개인의 경험은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와 선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는 살면서 겪는 일들이 세계관과 정치적 견해,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경제 사정, 교육 환경, 군대, 직장을 비롯해 다양한 범주를 아우른다. 이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첫 울타리인 가족과 관련한 환경은 개인이 겪는 경험의 폭을 좌우하는 요소다. 가족과 관련된 경험 중에서 최근 학자들이 주목하는 요인이 있다. 바로 ‘딸을 둔’ 것이 부모의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이다.


ⓒAP Photo1월20일 미국 전역에서 여성 권익을 주장하는 시민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1991년 사회학자 레베카 워너는 미국 디트로이트와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자녀 성별이 여성의 역할과 성차별에 대한 부모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Does the Sex of Your Children Matter? Support for Feminism among Women and Men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91). 조사 결과 딸만 있는 부모는 아들만 있는 부모보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동등함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성 역할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비중이 훨씬 높았다. 이러한 성향 차이는 특히 아버지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연구 발표 뒤 자녀의 성별이 부모의 세계관과 정치적 견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가 쏟아졌다.

2010년 앤드루 오스왈드 교수와 공저자는 영국 가계 패널조사 데이터를 이용해 딸이 태어나면 부모가 진보 성향인 노동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반면, 아들이 태어나면 보수 성향인 보수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논문을 발표했다(앤드루 오스왈드 외, 〈Daughters and Left-Wing Voting〉, 2010). 아래 〈그림 1〉은 아들만 셋이고 딸이 없는 사람과 반대로 딸만 셋이고 아들이 없는 사람이 노동당이나 자유민주당에 투표한 비율을 보여주는데, 딸만 있는 부모들이 진보 성향의 정당에 투표하는 비중이 훨씬 높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법안을 만들고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정치인이나 판사는 어떨까? 가족 안에서의 경험이 이들의 의정 활동이나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까? 언론 보도를 보면 실제로 그러한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의 롭 포트먼(공화당) 상원의원은 오랫동안 동성 결혼에 반대해왔다. 하지만 2013년 대학생이던 그의 스물한 살 난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뒤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이 문제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동성애자인 아들이 이성애자인 자신의 다른 자식과 똑같은 기회를 부여받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미국 네오콘의 상징적 인물인 딕 체니 전 부통령도 동성 결혼에 대해서만은 줄곧 찬성해왔다. 여기에는 딸 메리 체니의 커밍아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딸은 판사의 판결에도 영향 미친다

2008년 예일 대학 경제학자 에보냐 워싱턴 교수는 저명한 경제학 학술지 〈미국 경제학 연구〉에 ‘여성성의 사회화:어떻게 딸은 정치인 아빠의 여성 관련 이슈 투표에 영향을 미치나(Female Socialization: How Daughters Affect Their Legislator Fathers’ Voting on Women’s Issue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워싱턴 교수는 1997~2004년 미국 하원의원들의 투표 행태와 그들이 딸을 두었는지 여부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특히 다양한 이슈 가운데 여성과 관련된 법안에 의원들이 어떻게 투표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워싱턴 교수는 전국여성연합회(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NOW)가 선정한 여성 이슈 관련 법안 20개에 대한 투표를 바탕으로 여성 권익 신장 지수를 만들어 이를 따로 살폈다. 아래 〈그림 2〉는 자녀가 2명인 모든 의원을 대상으로 딸이 몇 명인지에 따라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한 법안에 어떻게 투표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들만 있는 하원의원에 비해 딸이 있는 부모일수록 여성의 권익 신장 지수가 높아짐을 알 수 있다.


단순히 평균을 비교했을 때뿐만 아니라 투표 행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요인을 통제한 뒤에도 딸을 둔 의원들이 그렇지 않은 의원들보다 진보적인 투표 행태를 보였다. 딸을 키운 경험은, 낙태나 출산처럼 여성 고유의 경험과 관련 있는 이슈에 의원들이 선택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딸은 판사들의 판결에도 영향을 미친다. 에모리 대학의 애덤 글린 교수와 하버드 대학의 마야 센 교수는 딸을 가진 미국 항소법원 판사들의 판결이 그렇지 않은 판사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했다. 이들은 항소법원 판사 224명의 자녀 성별 데이터와 이들이 내린 판결을 분석했다. 그 결과 딸을 가진 판사들이 성차별과 같이 여성과 관련된 이슈에서 여성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딸을 둔 판사는 다른 조건을 통제한 뒤 그렇지 않은 판사보다 성차별·성희롱 관련 판결에서 여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결할 확률이 7% 높았다. 성과 관련 없는 이슈에서는 딸 가진 부모인지 아닌지가 판결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딸을 키우는 것은 어떻게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특히 남자 판사는 딸이 젊은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성차별이나 성희롱, 혹은 출산과 관련된 이슈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의 세계관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글린 교수와 센 교수는 주장한다. 연구자들은 항소법원 판사의 성별과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서 딸이 있고 없고가 판결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는지를 분석했다. 만약 딸을 키우는 것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효과가 있다면 여성 이슈와 관련해 대체로 보수적인 공화당을 지지하는 판사나 남자 판사에게 그 효과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한다. 분석 결과 실제로 딸을 키우는 것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판사와 남자 판사들에게서만 나타났다. 원래 진보 성향이거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판사, 여자 판사는 딸이 있든 없든 여성과 관련된 판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AP Photo판사의 다양한 경험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위는 2015년 6월26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동성 결혼 합헌을 판결하자 기뻐하는 시민들.

딸을 키우는 것은 판사가 할 수 있는 경험 중 하나다. 이 외에도 다양한 경험이나 정체성이 판사들의 세계관과 나아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은퇴를 선언한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을 대신할 후보자를 인선하는 과정에서 대법관의 중요한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희망과 좌절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법관이라면 오로지 법률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판결해야지, 대법관에게 ‘공감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법 집행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양한 삶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법전만 달달 외운 채 내리는 판결이 오히려 공정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수많은 사건의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면 대법관을 비롯해 판사들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방법원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도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판사들의 경험과 법률 시스템에 대한 평가가 첨예하게 다르다. 여성 판사의 81%는 성차별을 법조계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답했지만, 그 어떤 남성 판사도 성차별을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남성 판사 18.5%만이 인종이나 출신 계급에 따른 차별 문제가 있다고 응답했다(일레인 마틴, 〈Men and Women on the Bench:  Vive la difference?〉, 1990). 남성 중심적 법조계에서 활동하는 여성 판사들은 당장 본인이 성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을 확률이 높고, 이러한 경험은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크리스티나 보이드 교수와 공저자들은 미국 항소법원 판사들이 내린 판결을 13가지 이슈로 나눠 분석했다(크리스티나 보이드 외, 〈Untangling the Causal Effects of Sex on Judging〉, 2010). 논문에 따르면 판사의 성별이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성차별과 관련된 이슈였다. 성차별 관련 판결에서 남자 판사가 재판을 맡으면 여자 판사가 재판을 맡았을 때보다 성차별을 고소한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사례가 10%포인트 낮았다. 또한 세 명의 판사가 합의부를 이뤄 재판을 맡을 때 세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여자 판사가 포함되면, 합의부에 속한 남자 판사도 성차별을 고소한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확률이 높아졌다. 연구진은 합의부의 숙의 과정에서 여자 판사가 성차별과 관련해 남자 판사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나 전문성을 공유하게 되고 이것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연합뉴스동성애 커밍아웃을 한 자녀를 둔 롭 포트먼 공화당 의원은 동성 결혼을 찬성했다.
‘그들만의 세계’라는 비판 덜 받으려면

개인의 경험과 함께 판사의 다양한 구성이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일련의 연구는 최근 모든 주요 재판의 합의부원이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됐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이른바 ‘전문가’ 패널이 모두 남성으로 구성된 경우는 매우 흔하다. 의회도 마찬가지다.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 미국 의회에서 여성의 건강, 출산과 관련한 권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 개정을 논의하는 패널이 모두 남성으로 구성돼 큰 비판이 일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부 다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패널을 찾아내 공유하고 고발하는 웹사이트가 생기기도 했다. 무언가를 직접 경험해봤다고 늘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채 편협한 인사로 구성된 의사 결정 기구가 가져올 문제점도 심각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특히 성차별이나 성희롱, 성폭행과 같이 여성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슈에서 편향된 패널 구성의 문제점은 더 심각해진다.

ⓒAP Photo딕 체니 전 부통령은 동성 결혼을 찬성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딸을 키우는 것처럼 가족 내에서 여성과 관련된 이슈를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 게 개인의 세계관과 정치적 견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많다. 이른바 가족 내 사회화라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일하는 엄마를 보고 자란 남성이 결혼한 뒤 아내가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더 지지하고 집안일을 분담하는 비중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라켈 페르난데스 외, 〈Mothers and Sons:Preference Formation and Female Labor Force Dynamics〉, 2004). 하지만 가족 내 여성과 관련된 모든 경험이 항상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앤드루 힐리 교수와 닐 맬호트라 교수는 여동생이 있는 남성이 남동생이 있는 남성보다 성 역할에 대해 더 보수적인 견해를 보이고 공화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는 논문을 발표했다(앤드루 힐리 외, 〈Childhood Socialization and Political Attitudes:Evidence from a Natural Experiment〉, 2013). 여성의 경우 동생의 성별은 정치적 견해나 성 역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 남성에게만 이러한 차이가 나타날까? 연구자들은 남성은 여동생이 있는 경우 어린 시절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덜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의 경우는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부모가 대체로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딸에게 더 많이 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남성은 집안일을 덜 하며 자란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여동생이나 누나와 함께 자란 남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집안일을 분담하는 정도가 혼자 자라거나 남자 형제들과 자란 남성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집에서 이루어진 사회화의 영향이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자녀의 성별이 부모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부모가 가족 내에서 성별이 다른 자녀들의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는지도 자녀들의 세계관은 물론 훗날 정치적 성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의 경험은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가 받을지 모르는 구조적인 차별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라면 업무 지식 못지않게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모든 경험을 두루 섭렵한 판사나 국회의원이 나타나 모든 이의 처지를 헤아리는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가족 가운데 동성애자가 있는 사람만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거나, 딸을 키워본 사람만 판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대신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나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조정해야 하는 기관이나 조직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이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할 때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여성이 구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불편함과 차별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그로 인한 법적 문제의 판결을 맡는다면 ‘엘리트들이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자명 유혜영 (뉴욕 대학 교수·정치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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