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집 앞의 헌책방에서 추리소설 다섯 권을 골랐다. 독자들이 습관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부르는 미스터리 장르는 굉장히 범주가 넓은 세계인데, 내가 질색하는 것은 톰 클랜시로 대표되는 국제 첩보물과 〈다빈치 코드〉같이 역사와 추리를 결합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이 한창 유행할 때 제주도의 어느 펜션에서 다 읽고 나서 퇴실을 하며 탁자 위에 놓고 나왔다. 이런 얄팍한 책에는 독후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다빈치 코드〉는 마이클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이 함께 쓴 논픽션 〈성혈과 성배〉(자음과모음, 2005)를 무단으로 베껴 쓴 모조품이다.

좌파 문화 이론가들의 추리소설 비판에는 교조적인 데가 있다. 그 가운데는 추리물이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함축을 갖는 민중의 적개심과 분노를 대리 해소해버린다는 것도 있다. 즉 추리물은 부자들을 하나씩 죽여 없애는 것으로 현실에서의 혁명 의지를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또 추리소설은 상층 계급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계층 간의 갈등을 추상적으로 봉합한다고 한다. 거대한 저택과 만능에 가까운 재력에도 불구하고 살해를 피하지 못하는 상류층은 그들이나 우리가 불행 앞에서 똑같은 운명을 나누어 가진 동류의 인간이라는 환상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귀족과 부자가 죽어나갔던 애거사 크리스티 시절에나 들어맞다.

노르웨이 작가 카린 포숨의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들녘, 2006)에는 어린 시절 실수로 어머니를 죽인 20대 청년과 어머니로부터 방치된 채 아동보호소에 수용된 열두 살짜리 소년이 나오고, 일본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들녘, 2014)에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초등학교 4학년생 두 명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온다. 또 독일 작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사라진 소녀들〉(뿔, 2011)에는 열한 살짜리 시각장애인 소녀가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당한다. 그리고 추리소설가로 공쿠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로지와 존〉(다산책방, 2014)은 저소득층 계층에서 벌어진 근친상간이 모티브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계층 하락에 어떤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들의 계층 하락이 추리소설에 더욱 생생한 사실성을 부여한 것은 분명하다.

덴마크 작가 페터 회는 소설에서 ‘넓고 얕은 지식’, 즉 교양을 얻으려는 사이비 추리소설 독자들이 열광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에세이적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쿤데라의 소설이 멜로디(스토리)와 하모니(에세이)의 필연적인 밀착을 보여주는 반면, 페터 회에게는 그런 밀도가 없다. 〈콰이어트 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에는 바흐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무수한 언급이 있지만 작품의 주제나 줄거리에 어떤 정합성도 더해주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경우 작중에 나오는 신학 논쟁을 쏙 빼놓고 범인만 찾아내는 독법은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나 같게 만들지만, 〈콰이어트 걸〉에서는 음악과 철학에 대한 작가의 변죽을 모두 빼도 독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앞서 읽은 다섯 권으로 추리소설 일반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 기회에 추리소설의 보수성은 새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읽은 추리소설은 사건 동기에서 작품 해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집·가족·어머니’로 수렴된다. 가해자는 어렸을 때 집·가족· 어머니로부터 학대당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고, 피해자 역시 집·가족·어머니의 보호를 잘 받았다면 희생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이번 사건에 어느 수사관이 남다른 집착을 하고 있다면, 그에게 집·가족·어머니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화에 저 잘난 페터 회도 동참한다. “당신에겐 구멍이 하나 있어. 우리 모두에겐 상처받은 자리가 있지. 하지만 당신의 구멍은 거대해. 당신이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해. 구멍은 항상 유년기에 받은 상처와 관련이 있거든. 아마 당신은 가난하게 컸을 거야. 어쩌면 아비 없는 자식이었을 수도 있고. 그 구멍이 심장을 식게 만들어.”

‘독서=유용성’ 굴레 벗겨주는 추리소설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지음, 박진희 옮김, 황소자리 펴냄

다카하시 데쓰오는 〈미스터리의 사회학-근대적 ‘기분전환’의 조건〉(역락, 2015)에서 일본 여성들이 서양 여성들보다 추리소설을 덜 읽는 것은, 살인 사건이 여성으로 하여금 생리적인 반발심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실용서나 수양서, 즉 ‘양서’에 한정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교육적 강제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보태야 할 또 다른 사항은, 추리소설이 여성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책임과 돌봄 노동을 은연중에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여성은 오락을 위해 손에 잡은 추리소설에서 오히려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헌책방에서 사온 책을 다 읽고 나서 〈시사IN〉 독자들에게 신간을 소개할 목적으로, 근 30년 만에 추리소설 한 권을 새 책으로 구입했다. 아이슬란드 작가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아무도 원하지 않은〉(황소자리, 2018)에는 두 번 반복되는 인상적인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이 지목하는 ‘죄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내세워 소년범들을 위한 민간 위탁 보호소 사업을 따낸 베이가르와 릴리야 부부다. 위선적인 기독교도는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화된 장식(cliché)인 것 같지만, 뉴스로 접하는 한국 기독교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작품에서도 집·가족·어머니는 작품의 중요한 동력이다. 나에게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를 묻는다면 ‘잊어도 좋기 때문에 읽는 것이 추리소설이다’라고 대답하겠다. 이번에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 본령을 위반했지만, 실제로는 읽자마자 순식간에 스토리를 다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 추리소설의 본령이다. 현대인의 독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이루어지며, 자기계발과 스펙으로 환전되어야 한다. 추리소설에는 그런 강박이 없다. ‘이번 여름휴가 때 유발 하라리를 읽었어’는 자랑이 될 수 있지만 추리소설은 그렇지 못하다. 스토리를 잘 기억했다가 잡담의 소재로 쓸 수는 있지만, 시험에 나오는 일은 없다. 추리소설은 ‘독서=유용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부터 독자를 해방시켜준다. 추리소설은 읽은 것을 까맣게 잊어버려도 무방한 그 자체로, ‘기억하라!’는 문화에 복수를 한다. 두 번 읽지 않을 것이기에 펜션에 슬쩍 버리고 와도 상관없고, 독후감을 쓰지 않아도 죄의식이 들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무용성은 그저 읽는 순간만으로 쾌락을 주고 숨을 쉬게 해준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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