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월8일 별세한 황현산 선생(고려대 명예교수·불문학)을 30년 넘는 세월 동안 만나왔다. 첫 번째는 후배이자 제자로서였다. “춘천에 가서 현산이한테 배우고 오거라.” 대학원 석사과정 첫 학기이던 1986년 여름, 고려대 불문과 강성욱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황현산 선생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65학번 대선배였다. 대학원생 대여섯은 영문도 모른 채 일주일에 한 번씩 강원대를 찾아갔다. 춘천의 여름은 무더웠다. 물이 많은 도시라서 그렇다고 했다.

황현산 교수의 강원대 연구실은 좁았다. 그곳에서 황 교수는 수업료도 학점도 없는 이상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황 교수의 성품이었다. 그분은 다정다감하고 매사에 친절했다. 당시는 교수나 높은 선배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어렵고 무서운 시절이었다. 선풍기 한 대 돌아가는 좁은 연구실에서 우리는 무릎을 맞대고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공부했다. 황 선생은 후배들이 준비를 덜 해와서 버벅대도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다. 단어 하나에 막혀 우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면 “이렇게 번역해봐” 하고 예를 일러주었다. 마치 열쇠 같았다. 우리말 단어 하나로 난해한 문장이 딸깍 소리를 내며 풀리는 느낌이었다. 2개월여 방학 내내 이루어진 그 수업은 내 평생 기억에 남아 있다. 수업 형식과 내용도 특별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황현산’이라는 선배이자 스승의 진면목이었다. 구체적이면서 유연했다. 우리는 그분에게 매료되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황현산 문학평론가가 8월8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73세.

두 번째로 선생을 만난 것은 기자로서였다. 내가 원 〈시사저널〉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일하는 동안
황 선생은 강원대에서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대 중반 황현산이라는 이름이 문단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황현산의 글’을 문단 바깥에서 접한 시인들이 자기 시에 대한 평론을 요청하며 그분을 문단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평론가 데뷔였다. 40대 중반 늦깎이로 문학비평을 시작했다는 것도 특이했다. 중년의 깊고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과 공부를 바탕으로 하는 선생의 평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했다. 시인 아폴리네르를 중심으로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시를 연구한 선생은, 특히 젊은 시인들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줄곧 옹호하고 응원했다.

선생의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역시 구체성이다. 선생이 내놓은 문장은 단정하고 단단했다. 수입산 이론으로 범벅 되기 일쑤인 난해하고 추상적인 평문에 견주어, 선생의 글에는 일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명쾌함이 있었다. 문학작품을 섬세하고 친절하게 해설해주는 평문이니 시인과 독자 모두 ‘황현산 스타일’에 열광했다. 10년 전 우리가 춘천에서 매료된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평범한 독자로 선생을 만났다. 2013년 선생은 연구서나 번역서, 문학평론집 같은 전문 서적이 아닌 일반 산문집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났다. 〈밤이 선생이다〉(난다 펴냄)는 선생이 써왔던 신문 칼럼을 묶은 책이다. 출판사가 제안해 교수 정년 퇴임 기념으로 펴낸 첫 번째 산문집이었다. 의외로 일반 독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선생의 제자들이, 20년 전 문단의 시인들이 선생을 처음 만나고 환호한 것과 비슷했다. 가뜩이나 위축된 출판시장에서 다름 아닌 인문학을 바탕으로 세상사를 읽은 산문집이 6만 부 이상 팔려나간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연합뉴스2017년 5월3일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황현산 문학평론가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선생의 글에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한 까닭 역시 세상에 대한 깊고 구체적인 통찰 때문이었다. 선생의 산문 대부분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밤이 선생이다〉).” 독자들은 선생의 사소한 사정을 전해 들으면서 자기 스스로의 사정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선생의 글이 지닌 독창성은, 독자들이 자기 사정을 돌아보아도 깊이 있게 반추하며 돌아보게 한다. 선생의 열렬한 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고 노회찬 의원의 독후감은 왜 많은 이들이 황현산의 글에 매료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글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그런데 불편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굉장히 커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국회방송 대담에서).”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선생의 문장은 밀도가 높다. “나의 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중략)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중략)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말과 시간의 깊이〉).” 황현산의 문장이 미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명쾌하기 때문이다. 그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에 수많은 비명과 탄성이 응축되어 있으니 문장의 울림은 단단하고 크고 깊다.

“30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다(〈밤이 선생이다〉).” 사제 관계로 시작해 3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온 내가 보기에도 그는 학자·평론가·지식인으로서 같은 방식의 일관된 길을 걸어왔다. 학계·문단·출판계로 점차 활동 영역을 넓히며 제자·시인·일반 독자를 만나왔으나 학문하는 태도와 사유하는 방법은 언제나 다름없이 깊고 구체적이었다. 그의 사유와 글에는 역설이 있다. 그는 부드러워서 날카로웠다. 피나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서 문제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어서 그의 글은 시의성 있는 사회 비평이어도 두고두고 읽혔다.

황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의 스승 강성욱 교수를 떠올린다. 강성욱 교수는 2005년 작고 일주일 전까지 하루 10시간씩 책상 앞에서 공부하던 수도승 같은 학자였다. 나는 지금까지 저렇게 대단한 스승과 제자를 본 적이 없다. 스승이 뿌리였다면 제자는 그 뿌리가 피워 올린 아름다운 꽃이었다. 뿌리는 거대했으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꽃은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세상을 밝히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황 선생이 보들레르를 시작으로 프랑스 상징주의 이후 시집 번역에 타계 직전까지 매달린 이유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기자명 토론토·성우제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ungwooj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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