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특강풀이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 1·2등급을 가려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따른 답 찾기를 가르치기가 너무나 지겨웠다.
그래서 ‘사람책’ 수업을 시작했다. 거창하게 사람책이라고 했지만, 쉽게 말하면 ‘3분 말하기’였다. 스스로를 사람책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세상에 꼭 던지고 싶은 것, 알리고 싶은 것을 발표하라고 했다.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PPT도 만들고, 보고서를 쓰고, 친구들의 눈을 보며 발표해야 하는 수업은 학생들에게 꽤 버거웠을 것이다. 다만 무엇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사람 앞에서 토해내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학생들은 서로 다 다른 텍스트였다. 학생들이 택한 주제는 수시·정시 논쟁으로 본 입시 교육 문제부터 곤충 화장품, 우리 사회의 갑질 문제, 청소년에 대한 편견, 몸의 형태에 맞는 웨딩드레스, 인간을 위한 건축, 넓게 보이는 실내 디자인 등 매우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사람책 중에 적어도 한 반에서 5명 이상이 발표한 주제가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주제는 페미니즘으로 공통되지만, 접근 방식은 다 달랐다. 달달한 드라마 속에 숨겨진 데이트 폭력을 읽어냈고, 디즈니 캐릭터 속에 숨겨진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비판했다. ‘홍대 몰카 사건’을 통해서 본 법정에서의 남녀 차별을 분석했고, 페미니즘이 과도하게 나갔다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균형을 잡자는 주장도 했다. 여성 정치인의 비율이 낮은 현실에 항의하기 위해 남성 후보만 적힌 투표용지에 대해 무효표 만들기로 행동한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집에서 자기가 딸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탈코르셋 운동을 언급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 바로 코르셋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공부는 안 하고 꾸미기만 한다며 학생들을 규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사이 학생들은 스스로의 꾸밈을 노동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를 성찰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학생들 발표를 들으면서 왜 ‘스쿨 미투’가 이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교육적 지도라며 신체에 접촉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나는 설명’이라며 하는 성적인 비유가 왜 이해되지 않고 불쾌감만 일으키는지. 다만 그것을 불쾌하다고 표현할 만한 언어가 없거나, 설령 언어를 안다 해도 내뱉을 만한 용기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면 불이익이 돌아오리라는 것까지 학생들은 이미 삶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학교가 준비되지 않아도 학생들은 밀려온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그 상황을 공유한 사람이라면 안다. 언어든 비언어적 표현이든 그 의미는 맥락이 만들어낸다. 학교는 이러한 맥락을 공유하는 제도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오해해서, 또는 학생들이 그 즉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다”라는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인권침해의 맥락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는 학교는 인권을 존중하라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학교 폭력을 당해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사에 의한 성희롱에 대응하지 못하는 학교가 학생에 의한 성희롱에도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교가 준비되지 않아도 학생들은 계속 밀려들어올 것이다. 첫 번째로 만나는 사회인 학교가 자신이 느낀 감각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는지 물을 것이다. 준비된 답변이 없다면, 모색하고, 공부해야 한다. 아마 그 첫 단추는 학생에게 그 감각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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