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형준 대표를 만나자마자 제빵과 제과가 어떻게 다른지부터 물었다. 권 대표는 1979년 문을 연 리치몬드과자점(본점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86 리치몬드빌딩)을 운영하고 있다. 흔히들 리치몬드제과라 부르지만, 정식 상호는 ‘리치몬드과자점’이다. 온라인에서는 ‘리치몬드베이커리(bakery)’를 앞세운다.

한국에서 빵집 또는 과자점이라고 하면, 기름지고 달고 짭짤한 간식을 주로 팔아서 먹고산다. 흔히 보이는 프랜차이즈 빵집, 시장 빵집의 제품이란, 식빵 및 바게트를 빼면 영어권에서 ‘스낵(snack)’이라고 불릴 만한 간식이 주가 된다.

“아, 또 그 질문….” 남들이 자신을 ‘제과사’라고 불러줄 때 기분이 좋다는 권형준 대표가 대답한다. 교과서의 정의는 간단하다. 반죽을 발효시켜 구우면 빵, 발효 없이 구우면 과자다. 이것이 기본이다. 기본을 알면 눈을 더 크게 뜰 수 있다. 발효를 거친 과자도 있다. 그렇다면 제빵제과에서 발효의 의의는? “발효를 거친 과자의 경우 이를 통한 부풀리기가 중요하죠. 빵에서 발효란 부풀리기뿐 아니라 빵 문화권에서 좋아하는 발효 향이 나게 하고, 빵 특유의 풍미까지 더하지요.”
 

ⓒ시사IN 신선영권형준 리치몬드과자점 대표가 제과 작업을 하고 있다.

기술자의 말끔한 설명이다. 여기 이르러 한국인의 식생활을 되돌아본다. 한국인의 주식은 알곡으로 지은 밥이다. 밥이 주식이 되는 식생활을 입식(粒食)이라고 한다. 이에 견주어 곡물의 가루를 반죽해 빵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는 식생활을 분식(粉食)이라고 한다. 입식 문화에서 기본과 중심은 맨밥이다. 우선 쌀밥, 보리밥, 조밥 따위를 제대로 짓고 나서야 밥상을 차릴 수 있고, 그 변형도 나온다.

분식 문화권에 견주면 빵이 그렇다. 매끼 먹어도 물리지 않도록 담박해야 하고 간을 하더라도 세면 안 된다. 맨빵이 기본이요, 반죽에 버터나 올리브유 같은 유지를 더하든, 달콤한 과일 부재료를 넣든 빵 자체의 주식다운 수수한 풍미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쓸 따름이다.

과자는 주식을 해결하고 나서 바라보는 음식이다. 못 먹어도 죽지 않는다. ‘맛이 있네, 없네’를 노골적으로 따지는 음식이다. 버터, 크림, 달걀 등 비싼 재료를 얼마든지 쓴다. 꿀이든 맥아당(엿)이든 비정제당이든 정제당이든 귀하디귀한 감미료를 흠뻑 머금은 기호품이다.

업계가 어려운 점이 여기 있다. 한국인에게 빵의 기본은 맨빵이 아니라 기름진 데다 단맛까지 강화된 ‘스낵’에 가까운 그 무엇일 경우가 많다. 당신은 정말 ‘빵순이, 빵돌이’인가? 아니면 기름기와 설탕에 홀려 스낵을 사 먹으면서 빵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과자는 거꾸로다.

“과자는 원래 달아요. 딱 한 조각 달콤하게 먹는 음식, 달아서 적게 먹어도 충분한. 그런데 과자 가게에 와서 ‘덜 단거 없어요?’ ‘나는 원래 단거 싫어해요’ 하면 제과사는 뭐가 돼요, 하하.”
 

ⓒ시사IN 신선영리치몬드과자점은 식빵·바게트·비스킷에서 케이크까지, 그리고 제과의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초콜릿과 아이스크림까지 갖추고 있다. 맨 위는 이 집의 시그니처 상품인 밤파이.

제빵제과 1세대와 2세대

권형준 대표는 2007년 리치몬드의 창립자이자 아버지인 권상범 대표(제빵제과 명장)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면서 제빵과 제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아울러 해방 이후 빵집, 제과점 매대를 지켜온 식빵, 단팥빵, 전병, 카스텔라, 꽈배기 등에 깃든 한국 제과의 역사성은 그것대로 껴안고 또 발전시켜야 했다.

1945년생 권상범 명장은 1961년 경북 의성 외숙모의 다과점과 대구 광월당제과점에서 빵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빵을 굽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해방 전까지 일본인 기술자 아래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어깨너머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빵과 과자를 굽기 시작했다. 이들은 식빵과 단팥빵, 화과자와 카스텔라를 만들며 1세대를 이루었다. 그 뒤를 권상범 명장 같은 2세대가 이었다. 2세대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기술혁신을 바란 업주는 실력 있는 직원을 일본 동경제과학교로 보냈다.

하나를 배우니 둘이 궁금해졌다. 권상범 명장은 유럽 제빵제과를 직접 배우고 싶어 1990년대에 스위스 리치몬드 국립제과학교, 프랑스 르노트르 제과학교 등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리치몬드 과자점 매대는 일본풍의 단팥빵· 소보로빵에서 점점 유럽풍의 파이와 케이크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사IN 신선영권형준 대표(위)는 아버지 권상범 명장에게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제빵제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권형준 대표는 1999년 무렵 리치몬드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버지처럼 2000년 일본으로 갔다. 2002년 일본 동경제과학교 양과자 본과를 거쳐, 2007년까지 일본 도쿄의 오봉비외탕(AU BON VIEUX TEMPS)의 가와다 가쓰히코 제과명인 문하에서 공부했다. 가업을 물려받은 2007년 무렵은 ‘제빵제과 3세대’가 시작됐다고 평할 만한 때이기도 했다.

“유학파 ‘파티시에’ ‘셰프’란 사람들이 전문점을 내기 시작했지요. 디저트 가지고 먹방도 하고. 아 공부 열심히 해야겠구나, 남한테 이게 무슨 제품이라고 설명할 줄 알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제빵제과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함께 리치몬드의 정체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리치몬드는 권상범·권형준 두 제빵제과사가 한국, 일본, 유럽을 오가며 40년 가까이 키워낸 일종의 빵·과자 백화점이다. 언제든 제품화 가능한 레시피가 400개가 넘는다. 식빵·바게트· 비스킷에서 케이크까지, 그리고 제과의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초콜릿과 아이스크림까지 다 갖추고 있다. 리치몬드 본점과 분점에서 일하는 주방 인력만 20명, 주방 밖 인력이 15명이다.

전 분야를 다루는 덕분에 일하는 사람은 기본 식빵, 프랑스풍 빵, 독일풍 빵의 제법을 비교해서 경험할 수 있다. 바싹 말리는 과자와 수분 넉넉한 과자 제법의 차이, 도구와 오븐 사용법이 선명하게 비교된다. 밤에서 까치밥나무 열매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의 당졸임법, 설탕과자나 초콜릿 활용법 등 1세대가 2세대에게 전하고, 한국과 일본과 유럽을 오가며 축적한 경험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 집의 시그니처 상품으로 자리 잡은 밤식빵, 밤파이는 이런 규모와 체제에서 가능한 제품이다. 주재료뿐 아니라 부재료 관리에도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디저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빵제과에 대해 이런저런 낭설도 많다. 권형준 대표는 인터넷에 나오는 몇 마디를 맹신하지 말라는 당부만은 손님들에게 꼭 하고 싶단다.

“기술자인 나도 19세기나 20세기 프랑스 기술자가 아니고, 손님들 역시 그때의 프랑스 부르주아는 아니잖은가. 여러 기술자가 세대를 이어 선택한 기술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안에서 스타일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정말 손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편안하게 즐기세요’이다.”

언젠가 굽고 싶은 ‘성미만월’

그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담아낸 대표적인 상품이 ‘마포카스텔라’다. 카스텔라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래했고, 일본에서 꽃피웠으며, 이제는 아시아 사람 모두가 즐기는 과자이다. 이를 고전적인 레시피에 기대 굽되, 권형준 대표는 ‘설탕시럽이 들어간 달걀찜’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카스텔라의 식감을 한국식 달걀찜에서 떠올려봤다. 반죽은 수분을 잡아주는 나무틀에 넣고 뚜껑을 씌운 뒤 압력밥솥 같은 오븐에서 찐다. 반죽의 수분이 속을 익히고, 오븐 안 열은 겉을 굽는다. 여기에 익숙한 달걀 풍미가 올라와야 한다. 그래서 마포카스텔라에 쓸 달걀은 따로 발주해 쓴다. 풍미를 배가시키기 위해 벌꿀도 더했다. 이 과자를 이 동네에서 대를 이어 굽고 싶다. 그래서 조금 지역을 넓혀 ‘마포’를 붙였다.

“나는 성산동이 좋고 서교동, 망원동이 좋아요. 제일 기분 좋은 휴식은 성미산을 5분간 멍하니 바라보는 거예요.”

권형준 대표는 언젠가는 고전적 기술을 바탕으로 폭신하고 달콤한 한입거리 한국식 팬케이크를 굽겠다는 꿈이 있다. 그때는 리치몬드 앞 성미산을 따 이름을 지을 것이다. 이름하여 ‘성미만월(城美滿月)’, 내 동네 성미산 위에 뜬 둥근달이란 뜻이다.

“요식업에서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해요. 음식의 식(食)이란 말을 풀어보면 ‘사람(人)’한테 ‘좋다(良)’는 의미잖아요. 그러면서도 멋이 있으면 좋잖아요. 성미만월 어때요?”

끝으로 한 끼를 위한 좋은 빵의 조건을 기어코 물었다. 독자를 위해서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갓 구운 빵’ 그런 게 편견인데요, 막 나와서 향이 살아 있지, 차가운 이물감이 없지, 수분 충분하지, 재료와 기술을 떠나서 당연히 일차원적으로 맛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처지지 않아야 진짜 잘 만든 빵이죠. 잘 지은 밥은 식어서도 모양이랑 풍미를 유지하지요? 좋은 쌀 썼구나, 잘 불렸구나, 뜸이 잘 들었구나 티가 나지요? 밥 가지고 생각해보세요.”

권상범 명장의 58년 업력, 권형준 대표의 19년 업력을 합하면 몇 년인가, 문득 셈을 해본다. 저 업력이 차곡차곡 쌓였구나 실감한다. 성미만월을 얼른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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