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은 현재진행형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퇴임 후 내부 규정에 따라 사용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강력한 자력에 의한 데이터 삭제 기술) 조치를 했다.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이 사용한 하드디스크 실물을 임의 제출받아 복구 중이다.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을 보면, 사법부 독립이 무색하다. ‘VIP(박근혜 대통령)’ ‘CJ(양승태 대법원장)’ ‘BH(청와대)’와 같은 정무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대면 조사도 없이 재판 거래를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 냈다. 지난 6월15일 대법관들도 “재판의 본질을 훼손하는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대법관들은 이것이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국민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 정문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법원을 향한 시선은 차갑다. 특히 재판 거래 의혹이 일었던 사건 당사자들은 법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당사자들은 양승태 대법원은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느낀다. 이들은 법원행정처의 문건을 증거로 6월5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나는 왜 양승태를 고발했는지’를 들었다. 또한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 410건 중 일부를 추가 공개한다. 날것 그대로 문건을 보면 양승태 대법원의 상고법원 로비 행태와 그 대가로 개별 재판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상고법원 홍보전은 세금을 사용하며 전방위로 이뤄지기도 했다. 또 올바른 사법개혁의 방향도 점검했다.

 

 

 

ⓒ시사IN 신선영김영선 전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은 ‘KTX 해고 승무원 대법 판결’의 당사자 중 한 명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함께 소송을 냈던 동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김영선 KTX 해고 승무원

34와 33은 숫자 1 차이가 아니었다. 한 세계가 종료됐고, 나머지 서른세 개의 세계가 파괴됐다. 법원에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의 소장에 이름을 올린 KTX 해고 승무원 34명의 이름 중 한 명이 빠졌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해서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승소했던 판결은 2015년 양승태 대법원에서 180° 바뀌었다.

김영선 전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 상황실장은 2010년 8월26일 1심에서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부장판사 최승욱)는 김씨를 비롯해 해고된 KTX 승무원은 코레일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2011년 8월19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5부(부장판사 김용빈)의 판단도 똑같았다.

그 결정이 2015년 2월26일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KTX 승무원과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가 구분돼 있다”라는 논리를 폈다. 대법원은 근로자 파견도 아니고 묵시적인 근로계약 관계도 아니라며 사용자인 코레일의 손을 들어주었다(제561호 KTX 돌연변이 판결, 청와대와 거래했나 기사 참조).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KTX 해고 승무원 34명 각각은 1·2심 승소로 받았던 밀린 임금 8640만원을 코레일에 돌려줘야 했다. 이자까지 합쳐 1억원에 가까운 돈이 빚으로 돌아왔다. 함께 소장에 이름을 올렸던 KTX 해고 승무원 박 아무개씨는 대법원 판결 18일 후인 3월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 문건을 보는 순간, 김씨는 먼저 세상을 떠난 그 동료가 떠올랐다.

김씨는 2003년 KTX 1기 승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2006년 난생처음 벌인 파업. 그리고 긴 싸움. 마지막 심정으로 2008년 법원 문을 두드렸다. 2015년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까지 그와 동료들은 7년간 법정 소송을 버텼다. 이들이 겪은 지난한 시간은 양승태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전략’의 하나로 표현됐다.

2015년 11월19일자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양승태 법원행정처 대외비 문건에는 KTX 재판 등이 사례로 담겨 있다. “그동안 사법부가 VIP와 BH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등)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옴.” 연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며 김씨는 더 비참해졌다.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그 전까지 가졌던 사법부에 대한 일말의 신뢰조차 사라졌다. 김씨는 “대법원 패소 판결 때 내가 모르는 법리가 그래도 있을 거라고 애써 믿으려고 노력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을 보니 그런 노력이 참 허무하게 느껴졌다. 법리가 아니고 ‘BH에 힘을 보탠 판결’이라니…”라고 말했다.

문건 공개 이후 김명수 대법원의 태도는 더 놀라웠다. 현직 대법관들이 검찰 수사도 하기 전에 재판 거래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 문건에 나오는 ‘교감’ ‘물밑’ ‘조율’ ‘역할 수행’ 따위 단어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김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재판 거래’ 의혹이 깨끗하게 밝혀지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떳떳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시사IN 신선영송재혁 전교조 대변인은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면서 해고자 신분이 되었다. ‘전교조 법외노조’ 관련 재판이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 문건에 등장한다.

■ 송재혁 전교조 해고 교사

대부분 낯설어하는 단독 사진 촬영인 데다, ‘나는 양승태를 고발한다’라는 팻말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할까 봐 먼저 말을 걸었다. “어색하시죠?” “저 이런 거 많이 해서 괜찮습니다(웃음).” 생활한복 차림에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라는 이력까지 더해지면 영락없는 ‘운동권 선생님’이다. 그런 송재혁 전교조 대변인이 대학 시절에는 ROTC였다. ‘각진 상태’로 한국교원대를 다녔기에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1992년 8월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시설물을 알아서 고치고 위아래 모두에게 잘하는 초임 남자 교사라, 교장에게 ‘예쁨’도 받았다. 그러던 1994년 초 복직한 전교조 해직 교사 2명을 만났다. 전교생 조회 시간, 으레 하던 부임 교사 소개가 생략됐다. 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싫어서 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막연히 느끼던 학교의 비리, 권위주의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 1994년 말 전교조에 가입했다. 권한 사람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전교조는 합법 단체가 아니었다. 합법화는 1999년에서야 이뤄졌다. 전교조 가입 이후 〈전교조 신문〉 등을 동료 교사 책상에두면, 교장이 따라와서 “불법 단체 전단지”라며 수거해갔다. 그럴 때마다 송씨는 “불법이 아니라 비합법”이라고 맞섰다.

1999년 합법 단체가 되고 14년이 지난 2013년 다시 비합법 상태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고용노동부가 전교조를 법외노조라고 통보했다. 이에 맞서 전교조는 소송을 제기했다. 행정부의 부당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이었다.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가처분은 이기고, 본안은 지는 등 결과가 엎치락뒤치락하던 2014년 9월19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민중기)가 고용노동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효력정지를 결정했다. 가처분 1심에 이어 2심도 전교조가 이겼다. 전교조는 법내 노조 지위를 회복했다.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둔 2014년 12월3일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라는 제목의 대외비 문건을 작성했다. 3심이 2심과 같이 전교조 쪽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한다면 “대법원의 각종 중점 추진 사업(ex. 상고법원 입법 추진 등)에 대한 견제·방해가 예상됨”이라며 ‘BH 입장 분석’을 적었다. 그러면서 대법원이 전교조 사건을 “양측(대법원·청와대)에 윈윈의 결과가 될 것”으로 예상하며, 사건을 2심 그대로 따를지 아니면 파기환송을 할지 표로 정리해 ‘BH와 대법원’의 이해관계를 정리했다.

실제로 이 문건이 쓰인 6개월 후인 2015년 6월2일 양승태 대법원은 문건의 표현대로라면 “BH 상당한 이득, 대법원 상당한 이득” 결과를 냈다. 1·2심과 다르게 전교조가 졌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는 법외노조 처분 효력정지를 기각하고 2심으로 돌려보냈다. 즉시 전교조는 법외 노조가 되었다. 2016년 1월21일 본안 소송도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황병하)에서 패소했다(본안과 가처분은 지금까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015년부터 전교조 전임자 역할을 한 그는 그 순간 해고자 신분이 되었다. 비합법 노조 활동을 인정할 수 없다며 교육 당국이 ‘직급면직(해고)’ 처분을 했다. 수업 중 조는 아이들과 부대꼈던 그 시간이 교사의 존재 의미라며, 빨리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송씨는 이런 걱정도 했다. “무슨 사법부 문서에 BH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삼권이 분리된 국가’라고 가르쳤던 게 부끄럽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이 이뤄져야 하는 나라’라고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시사IN 신선영양민호씨는 긴급조치 9호 피해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양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양승태 대법원’ 아래에서 패소했다.

■ 양민호 긴급조치 9호 당사자

2003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다. 국민참여수석실 산하 민원비서관을 맡았다. 각 정부기관과 시민의 민원·고충을 처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처음 업무 파악을 위해 각 기관에 연락해 면담을 했다. 법원행정처도 그중 한 기관이었다. 의례적인 방문이라 여겼는데, 며칠 있다가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쪽에서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법부가 행정부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와 접촉하는 모습 자체가 부적절해 보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더 이상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다. 독립된 조직으로서 사법부 위상을 강조했던 그때를, 양민호 전 청와대 민원비서관은 15년 만에 다시 떠올렸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 문건을 보면서다. 양씨 사건도 해당 문건에 적혔다. 그는 긴급조치 9호 피해자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31일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을 보면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음.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대통령 긴급조치가 내려진 당시 상황과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고려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해당 문건에는 2015년 3월26일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인용해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음”이라고도 적혀 있었다. 이 문건이 만들어진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2015년 8월6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오찬 회동을 했다.

양씨는 이번 문건을 보며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라는 제목을 여러 차례 곱씹었다. 의심받을 만남조차 꺼리던 그 사법부가 어느새 개별 재판을 박근혜 정부 국정을 돕기 위해 예시로 들고 있었다. 실제로 양씨는 국가 배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2013년 9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2010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는 위헌·무효’라고 선언한 연장선이었다. 형사소송에서 무죄를 받았으니, 그에 따른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국가를 상대로 청구했다.

원고 일부 승소를 인정한 1심(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 재판장 김연하)을 깨고, 2015년 4월7일 2심(서울고등법원 민사31부. 부장판사 오석준)은 원고 패소를 선고했다. 상고심도 신속하게 진행돼 두 달 만에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에서도 패소가 확정됐다. 양승태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자체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와 같은 2심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양씨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후 손해배상 청구를 한 과거사 피해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줄줄이 패소했다(20~22쪽 기사 참조). 긴급조치 배상금을 받아 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들’을 만들어 백서를 내는 등 과거사 기록 작업을 하려던 계획도 대폭 수정되고 연기됐다.

그럼에도 양씨는 ‘과거’를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 시절 살았던 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았을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여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75학번인 그는 학교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배우는 게 더 많은 학생이었다. 그 바람에 제적을 세 번 당했다. 1978년 박정희 반대 시위를 하다 영장 없이 체포돼 고문당했다. 당시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고 긴급조치 비방 시위를 했다’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징역 2년이 나왔다. 1979년 8월15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이미 300일 넘게 감옥에서 산 상태였다.

“위헌이지만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 돈으로 배상해줄 수 없다는 문구는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결국 그 궤변을 들고 양승태 대법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는 정황이 문건으로 나왔다. 내가 양승태 대법원장을 고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한다. 국가에 또 실망하고 싶지 않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