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여행작가로 첫 명함을 내밀었다. 14개월 취재하고 12개월 집필한 끝에 인도 여행 가이드북을 펴냈다. 오랜 노동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 곳은 베트남이었다. 분명히 쉬러 갔는데 나는 어느새 하노이 공항 곳곳을 취재하고 시내로 나가는 교통편을 체크하고 있었다. 쉬기는 글렀고, 오랜 궁금증이나 풀어보기로 했다.

나는 베트남과 관련해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베트남 건국 영웅 호찌민 주석이 정말로 〈목민심서〉를 애독했는지 궁금했다. 1988년 고은 시인이 한 신문에 실은 ‘손문(쑨원)과 호지명(호찌민)과 김구’라는 글은 꽤 흥미로웠다. 호찌민 주석이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의 기일까지 알아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호찌민 주석 무덤에 부장품으로 〈목민심서〉가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시사IN 이명익호찌민 시 인민위원회 청사의 호찌민 동상.

사회주의 특성상 최고 지도자의 애독서는 서점에 반드시 깔려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노이에 있는 몇 개 서점을 돌아다녀도 베트남판 〈목민심서〉는 찾을 수 없었다. 서점 외 다른 곳에도 발품을 팔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호찌민 주석의 유품 중 〈목민심서〉는 없었다’ 공식 발표

묘한 일이었다. 우리만 아는 진실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26개월 만에 얻은 한 달의 휴식 여행 중 열흘을 허공에 날려야 했다. 그리고 의문은 2006년에야 풀렸다. ‘호찌민 주석 옆에는 〈목민심서〉 없었다’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베트남 호찌민 박물관 측이 호 주석이 남긴 유품 12만 점 가운데 〈목민심서〉는 없었다는 공식 답변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퍼졌는지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이후에도 가짜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이 글을 쓰려고 검색해보니, 2년 전에도 한 경제신문이 ‘호찌민 주석과 〈목민심서〉’ 스토리를 재탕했다.

〈목민심서〉와 호찌민 주석을 예로 들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꽤 많다. 이야기 대다수가 한국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별다른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몇몇 개인이 남의 나라에 가서 무안해지는 걸 넘어서는 일도 발생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 총리 앞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이 우리의 3·1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이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가 집필한 〈세계사 편력〉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됐다. 〈세계사 편력〉에는 네루가 1919년 조선의 민중 봉기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읽은 한국 독자들이 인도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된 암리차르 대학살이 1919년 4월13일에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1919년 3·1운동이 곧바로 인도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한 결과다.

그런데 인도 독립운동사는 그보다 훨씬 앞서 시작됐다. 간디가 남아공에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성공시킨 때가 1900년, 인도 동부의 곡창지대 벵갈을 영국이 분리하려 하자 일어난 벵갈 분리 반대투쟁이 1905년이었다. 더욱이 국내에서 3·1운동이 퍼진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강화도의 경우 3월5일, 용인은 3월10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멀고 먼 인도까지 한 달 남짓 만에 전파돼 영감을 주었다는 건 무리한 추측이다. 제국주의 횡포에 시달린 두 지역이 비슷한 시기에 개별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끝으로 하나 더.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48권 16책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호찌민 주석이 베트남 밀림에서 게릴라전을 지도하면서 베갯머리에 두고 늘 참고할 정도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그때 베트남에서 ‘다산 어록’이 〈마오 주석 어록〉처럼 핸드북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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