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6월에 ‘평화’를 주제로 독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는다며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강연을 앞두고 담당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께 드리는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었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는지….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억울하게 잡힌 분들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토록 엉뚱한 질문이라니, 과연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핵심 질문이구나 싶었다. 주소는 개인의 사회적 좌표다. 그 학생은 폭력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이 어떻게 공적 발언의 장을 확보해 ‘나 여기 있음’ ‘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절차와 경로의 시작점을 묻고 있었다. 그건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집의 기획 의도와도 닿아 있다. 고통의 출구를 찾는 법은 삶의 필수 기술이니까.
나는 아이들을 만나 답변했다. 간첩 누명을 쓴 분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진실 밝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을 때 진상 규명을 신청했다고.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같은 단체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그분들이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남긴 기록과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며칠 후 나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었다. 이주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피해 증언집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다. 아니, 피해 대상만 다를 뿐 익히 ‘알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간 내가 만난 선주민(한국인) 여성들의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 사례와 내용이 일치해 오싹했을 정도다. 특히 캄보디아에서 온 쏙카의 경험은 가정폭력을 넘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가까운데, 그 지옥을 그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쏙카에게는 쏙카를 위해 통역을 해주고 시어머니를 설득시켜준 사촌언니와 동서가 있었다. 통장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폭력 신고를 도와준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었고, 집에서 나왔을 때 쉼터로 연결해준 경찰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도록 도와주는 쉼터가 있다. 고립되어 있는 쏙카를 살려준 것은 세상과의 연결이었다(35쪽).”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한 말
당사자 증언에 대해 전문가가 쓴 해설이다. “고립은 피해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가정폭력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31쪽)”라고 한다. 어디 가정폭력뿐일까.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의 경우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그래서 ‘세상과의 연결’, 즉 내 존재를 남이 알게 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아울러 피해자는 어떤 일시적 상태의 명명이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가 그분들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고 살아갔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이주여성들의 생존담도 꼭 그러하다. “피해자의 취약성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문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이들의 행위성을 강조한다(187쪽).”
사실 그날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여러분도 폭력을 당하면 꼭 도움을 주는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가라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잘한 거 같다.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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