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와 모카가 문 앞을 기웃거렸다. 김현국 편집자(51)가 서둘러 주방을 향하며 말했다 “저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밥 주는 거예요.” 각각 카페라테와 카페모카 색의 털을 가진 길고양이 두 마리가 문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느릿느릿 ‘밥그릇’을 찾아갔다. 오랜 기간 반복되어온 풍경 같았다. 비 내리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한 주택가의 오후. 길고양이와 사람 서너 명이 커피 향 나는 ‘우주소년’으로 모여들었다.

우주소년은 3층짜리 빌라 건물 1층에 들어선 동네서점이다. 앞에는 카센터가, 뒤로는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여행·건축·영화·소설 분야 등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책과 각종 ‘동네서점 에디션’이 진열된 풍경은 여느 동네서점과 다르지 않았다. 책 사이로 널찍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독서모임, 일본 역사 강좌, 스페인어 교실, 영화 상영회 등이 열리는 자리다. 책만큼이나 많은 동네 사람들이 의자에 머물다 간다. 매장 곳곳에 특히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최근 우주소년이 낸 〈소년기〉. 4년차 동네서점 우주소년이 출판을 시작했다.

ⓒ시사IN 이명익박우현 우주소년 대표(오른쪽)가 출판을 결심하자 출판 시장의 어려움을 아는 김현국 편집자(왼쪽)는 말렸고, 경성현씨(가운데)는 응원했다.
전국에 동네서점 380여 개가 있다. 숙박을 겸하는 서점, 식물이 있는 서점, 퀴어 서점 등 성격도 다양해졌다. 수가 늘어난 만큼 폐점·휴점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임대차 재계약 시점이 돌아오는 3년째가 동네서점의 위기라고들 한다. 우주소년에게 출판은 새로운 돌파구이기도 했다.

박우현 우주소년 대표(51)가 서울 강북에 살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자리 잡은 건 딸아이의 학교 때문이었다. 대안학교에 관심이 있어서 알아봤지만 대부분 기숙형이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대안학교는 통학이 가능했다. 콘텐츠 기획사를 하던 그는 강북까지 출퇴근하기가 버거웠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2013년 11월, 소규모 강좌나 모임을 주최하는 문화공방 우주소년을 열었다. 2014년 도서정가제가 도입되면서 동네서점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우주소년도 2015년 1월부터 서점으로 변신했다.

서점을 차릴 때부터 출판을 고려했다. 책방의 역할이 책을 소비하는 데 그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함께 읽고 공부하며 생산되는 콘텐츠를 책으로 엮고 싶었다. ‘마을 콘텐츠 플랫폼’을 자처하는 우주소년과 어울리는 작업이기도 했다. 찾아보니 일본에는 출판사 이름에 서점이 들어간 곳이 많았다. 이와나미 서점도 작은 서점으로 시작해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가 되었다. 이웃들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었다. 박 대표처럼 아이 때문에 이사를 왔다가 정착한 학부모가 많았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두지 않는 자녀에게 뭘 권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이 동네에서 가능하길 바랐다. 우주소년에서 시작된 출판이 지역 청년을 채용하는 데까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첫 책 〈소년기〉는 박우현 대표가 집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내려간 책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어머니와 중학생 아들이 나눈 4년간의 편지를 묶었다. 1950년대 일본에서 출간 당시 23만 부가 팔리고 이후로도 꾸준히 나간 스테디셀러다. 한국에서도 1973년에 나왔다. 중학생 이치로와 심리학자인 하타노 이소코가 편지를 통해 일상, 가족, 진학,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시대는 다르지만 어젯밤과 오늘 아침이 다른 중학생의 심리 변화와 어떤 질문에도 성의껏 답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마음을 건드린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동네 독자들의 응원으로 70년 전 나온 책을 복간하기로 했다.

결실을 얻기까지 1년이 걸렸다. 책의 저자인 어머니와 소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일본 출판사도 유가족의 연락처를 몰랐다. 소년의 아들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다. 그가 좋은 조건으로 계약에 응하며 응원해주었다. 그사이 박 대표는 객원 편집자로 경험을 쌓고 편집자 강의도 들었다. 그와 함께 책을 만든 김현국 편집자는 처음에 출판을 말렸다. 출판 시장의 어려움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말릴 단계가 지난 뒤에 그도 동참했다. 우주소년의 기획위원이자 재즈 칼럼니스트인 경성현씨(54)는 “처음 동네서점을 낸다고 했을 때도 걱정이 많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응원했다. 출판을 시작할 때도 비슷한 심정으로 지지했다”라고 말했다.

“서점은 공동체성이 남아 있는 공간”

책을 만들며 술도 많이 마셨다. 책의 어느 부분을 강조할지 머리를 맞대는 자리, 생각이 많았다. 70년 전 첫 출간 당시 일본에서는 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일본 출판사는 아들 이치로의 도쿄 대학 이력에 집중했다. 한국에서도 그걸 강조하면 더 팔릴 수 있겠지만 다른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전쟁 와중에 책만 읽는 아버지 대신 집안 대소사를 책임져온 어머니가 정작 필요한 결정을 아버지에게 미루자 아들 이치로는 말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부속물이나 하인처럼 느껴져 싫습니다. 제게 소중한 어머니라는 점을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어머니는 좋은 지적임을 인정하며 사회 활동의 폭을 넓혀나간다.

동네서점 대부분이 책만 팔지는 않는다. 저자 강연 등을 통해 작가와 독자의 접점을 넓히는 곳이 늘고 있다. 우주소년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일본 탐방은 좀 더 특별하다. 우주소년은 마을 탐방단을 모집해 매년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가 운영하는 일본 돗토리 현의 빵집 ‘다루마리’를 찾는다. 2010년 와타나베 이타루를 초청한 게 계기가 되었다. 마을과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저자의 철학에 공감하는 주민들이 많아 이웃들과 의기투합해 그를 초대했다. 저자가 지향하는 삶과 마을 사람들의 고민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교류의 결과도 곧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서점 안팎의 고민들을 출판으로 이어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최근 우주소년에서는 ‘머내여지도’라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지역 서점이니 지역의 역사를 알아보자는 데서 착안해 동천동 인근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는 모임이다. 주민들한테 펀딩을 받아 책으로 내볼까 구상 중이다. 작업에 참여하는 오유경씨(46)는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일대가 변두리 시골마을에서 산업화를 거치며 공장지대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다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는데 공동주택인데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찾아볼 수 없다. 서점은 그 공동체성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동네서점이라는 이름에 충실하게 주민들이 모이는 우주소년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네 길고양이도 다니러 간다. 마을이라는 우주의 한구석, 동네서점이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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