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파이팅.’ 필자 중 한 명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다행히 여름은 문학과 친한 계절이다. 극단적인 날씨, 몰입하기 좋은 소설이 특히 그렇다. 올해도 여름을 앞두고 많은 소설이 출간되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한국 소설 여섯 권을 소개한다. 문예지를 만드는 작가·평론가·시각문화연구자가 각각 삶을 버티게 하는 소설, 나 자신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소설, 끔찍함을 보여주는 소설을 추천해왔다.


ⓒ윤성희


이 소설을 읽었기에 하루가 꽤 괜찮아졌다

서효인 (시인·〈릿터〉 편집장)

아침부터 종일 일이 너무나 많았다. 도서전 준비에 동원되어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 어떤 저자로부터 꽤 날카로운 메일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앉을 자리가 없는 경의선 전철에서 나는 의외로 쉽게 무너졌던 것 같다. 어두운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유난히 바스락거려서 문지르면 모든 표정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오늘 하루가 어쩌면 내일까지도,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시간까지 다 폐기될 것만 같았다. 애써 가슴팍 쪽으로 멘 백팩에는 다행히 〈경애의 마음〉이 있었다. 작가인 김금희는 물론이고 표지로 쓰인 안소현의 그림을 좋아한다. 괜히 표지를 쓰다듬으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고 싶은 요량에 자리가 나기만 간절히 기다렸다.

〈경애의 마음〉김금희 지음 창비 펴냄
한참을 기다려서 중력에 조금 덜 저항하는 자세가 되고서야 경애와 상수를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인천으로 가는 1호선 열차는 아니었지만, 홍대입구역 지나는 경의선에서 인천에 갔던 어린 경애와 상수가 되어본다. 상수를 따라서 ‘나에게 무심했던 것’과 ‘내가 열정적이었던 것’을 기억해본다. 경애를 따라 ‘내가 잊지 못하는 것’과 ‘결국 떼어내야 하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전철을 가득 메운 북부 경기인 거개가 그러하겠지만, 경애와 상수도 지쳐 있긴 하나 무너지지 않는다. 문득 고개를 들어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주임이니 과장이니, 그게 아니라면 그냥 선생이니 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버티고 있었다. 애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용기를 내는 마음, 그 마음들을 헤아리는 마음들을 연료 삼아 버티는 것이었다. 그 마음들을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꽤 괜찮아졌다. 짧은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마음을 다해 썼다”라고 했는데, 그 마음이 감사해서 마음으로부터 울음이 나왔다. 경애가 말을 걸어준다면,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소설은 이미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고, 나는 이 마음을 긴히 간직하는 것으로 하루를 또 잘 지낼 수 있겠다 싶다. 〈경애의 마음〉은 그런 마음을 주는 소설이다. 버티는 마음, 잘 지낼 수 있는 마음.

집에 도착하니 깊은 밤이었는데, 아이들은 아직 말똥히 깨어 있었다. 아내는 낮잠 타이밍이 좀 어긋났다 싶더니 여태 이러고 있다고, 설명인지 변명인지 모를 투로 말했다. 내게 어떤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하루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바깥의 내가 아닌 집 안의 당신이었을 텐데, 내가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아내는 그 외의 많은 것을 감당한다. 어떤 마음으로 버티는 것인지 감히 묻지 못한다. 그저 괜찮겠지 넘겨짚으며 나 좋을 대로 행동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이 모종의 본능으로 인해 아빠가 아닌 엄마만을 찾을 때, 아들은 일하느라 바쁠 테니 안부 전화는 어련히 며느리가 할 것이라 여기는 부모를 대할 때,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 때 거실이 깨끗하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을 때는 다소 언짢아하는 나를 발견할 때 그렇다.

〈네 이웃의 식탁〉구병모 지음 민음사 펴냄
구병모의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은 이런 심리를 식탁 위로 가져와 포크와 나이프로 죄다 찢어발겨 놓는다. 나는 그 앞에서 내 살이 그런 듯 아프고 부끄러웠다. 아내는 이른바 독박 육아 중인데, 육아도 육아지만 산후조리원이나 어린이집 등에서 이러저러하게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를 꽤 불편해했다. 그러나 그저 엄마이기 때문에 남 보기에 적절하고 아이 키우기에 적당한 위치로 스스로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네 이웃의 식탁〉에는 보다 본격적인 제한이 있다. 다출산을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는 공동주택. 사실상 고립된 곳에서 외관상 긴밀해질 수밖에 없는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의 안녕이라는 이룰 수 없는 취지를 바탕으로 시작된 공동육아…. 사각형의 식탁처럼 딱 들어맞는 제한 안에서 더욱 쪼그라드는 자는 역시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경력은 끊기기 쉽고, 육체적 노동은 물론이고 감정 노동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지금도 버티고 있을 것이다. 내 곁에 가장 가까운 나의 아내도 버티고 있다.

〈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나면 그 마음의 불편함을 확연한 모양새로 마주할 수 있다. 대충 넘어갔던 순간의 마음을 그나마 짐작할 수 있다. 조금은 까끌까끌할 것이다. 다소 예민해질 것이다. 마음이란 게 원래부터 둥글둥글한 건 아니니까. 엄마의 마음도 마찬가지니까.

아이들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까무룩 잠들었다. 아내도 함께 잠든 듯하다. 나는 아직 뒤척이는 큰아이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책의 뒷면을 다시 쓰다듬는다. 어떤 소설은 우리를 버티게 한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경애의 마음〉과 〈네 이웃의 식탁〉을 읽었기에 올여름은 잘 버티며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을 다하여 김금희·구병모 두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두 ‘위트 전문가’는 어떻게 끔찍함을 그렸을까

김신식 (시각문화연구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당신은 언제 사람이 끔찍하다고 느끼는가. 붐비는 지하철에서 시큼한 땀 냄새를 맡을 때? 누군가 어제 실컷 떠들어댄 이야기를 재차 꺼낼 때? 응원하는 팀이 상대 팀에게 지면 심판이 뒷돈을 받았다고 매번 투덜거리는 이를 맞닥뜨릴 때? 끔찍함에 관한 색인을 만든다면 그 분량은 상당하다.

당신이 근래 서점에 가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묶자면 ‘끔찍함의 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런 책들은 자신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는 타인의 생활상을 열거한 뒤 시쳇말로 ‘사이다’ 같은 대처법을 제안한다. 소개하려는 두 소설을 나란히 놓았을 때 끔찍함을 떠올렸다. 한데 소설이 역설하는 끔찍함은 의미가 조금 남다르다. 작가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과 내가 사람 자체인 사실. 정말 끔찍하지 않나요?’

〈서로의 나라에서〉송지현 외 지음 은행나무 펴냄

여기까지 읽고 당신은 벌써 후덥지근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왠지 여름 대신 겨울과 어울린다고 속닥거릴지 모르겠다. 안심해도 된다. 두 작가 모두 무겁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치를 떠는 위트 전문가다. 그렇다면 이들의 위트는 어떻게 끔찍함을 그려내고 있을까.

먼저 〈서로의 나라에서〉에 실린 송지현(위 사진)의 ‘커튼콜, 한 번 더 박수’는 ‘피식거림’이 두드러진 소설이다. 작품은 살면서 좀처럼 되는 일이 없는 세 청년이 뇌호흡 센터에서 만나 벌이는 해프닝을 다룬다. 낭패감에 둘러싸여 방황하는 나, 사랑하는 대상에 모든 걸 쏟아야 직성이 풀리는 갱, 자살 시도라는 비화를 감춘 채 센터를 운영해온 긴. 센터에서 수련하며 친해진 세 청년은 어느 날 긴의 방에 모인다. 나와 갱은 긴의 믿음과 권유에 따라 종말을 기다린다. 재래시장에서 산 치킨을 뜯으며. 세 청년이 밤을 통과한다면 기다리던 최후의 날이 올까. 작가는 둔중한 기운을 뺀 채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다음 날을 소묘한다. 가령 갱은 ‘뭐야, 바뀐 건 하나도 없잖아’라는 식으로 긴을 책망하기보다는, 긴을 놀릴 거리가 생겼다며 출근을 준비한다.

소설을 읽고 나면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앙증맞은 캐릭터 양말을 신고 온 사람을 보고선 피식거리는 분위기가 내내 연상된다. 이는 단순히 소설 자체의 무게감을 덜기 위한 작가의 기교로만 읽히지 않는다. 송지현 작가는 작품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피식거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반문하는 듯하다. 나 한 사람이 인생을 감당하는 게 왜 이리 무겁고 끔찍한가, 그것에 치중하는 과정도 사람의 끔찍함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내가 나이기를 찾는 법, 사람이 사람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법으로 가득 찬 온갖 수련이 있다. 그런 수련법이 휴식과 명상을 외피로 두른 채 시련을 받아들이는 매뉴얼을 강권할 때, 당신과 나는 정녕 만족했을까. 시련을 마주보며 나를 찾아가자는 몰입의 과정이 에두르는 낯간지러운 인간미에 흡족해하는 대신 작가는 피식거림이라는 실천을 제안한다.

〈편협의 완성〉이갑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갑수 작가의 〈편협의 완성〉은 ‘이죽거림’이 넘실대는 소설집이다. 단 ‘냉소를 위한 냉소’ ‘빈정거림을 위한 빈정거림’에 머무르는 작품 모음집은 아니다. 작가는 이죽거림을 통해 인간 고유의 지혜를 선사한다고 간주되는 금언과 사고에 대항한다. 특히 문학을 공부하는 과학도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온 작가의 작품에선 과학에 관련된 사례·일화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가 과학을 끌어들여 말하는 문학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인간은 왜 자신의 경험담, 거기서 나타나는 슬기로움에 취해 있는가. 탈피할 수 있는 계기는 없을까.

이런 맥락에서 수록작에 다양한 인간 군상만큼 여러 사물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볼 법하다. 작가는 사물의 삶과 사람의 삶을 명랑하게 대조한다. 그러면서 ‘인간적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야유를 보낸다. 인간은 자신을 비굴하고 비루하다고 부정하면서까지 인간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죽거림과 함께. 나는 이러한 이죽거림이 조직하는 비관주의에 아직 희망을 건다. 자신에게 과하게 몰입하는 자들이 놓지 않는 인간다움에 대응하는 피식거림에도. 




어쩐지 서늘해지고 어쩐지 사무치는

양경언 (문학평론가·〈문학3〉 기획위원)

나는 작품 앞에 있는 독자를 사람으로 대접하는 소설에 매력을 느낀다. 사람이라는 말이 짊어지는 무수한 한계에 등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게 만드는 힘을 길러주는 소설에 신뢰를 보낸다는 얘기이다. 생각해보라. ‘사람다운’ 꼴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혹은 사람이기 위한 조건을 따지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매섭고도 외로운 일인지를. 어떤 소설은 웬만해선 감추고 싶지만 도무지 없앨 수 없는 과오마저도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사람을 상투적으로 대하는 세계에 저항한다. 그런 일을 해내기 위해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을 견디곤 한다. 그러한 순간에 이들이 느꼈을 부끄러움이나 혼란은 거기에 접속한 독자들의 삶과 연동하면서 우리가 사는 방식을 돌아보게끔 이끄는 매개가 된다. 자기 자신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인물을 담아내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어엿해질 수 있는 통찰의 경로를 얻는다. 이기호와 최은영의 소설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이기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이기호의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비유하자면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끼얹는 찬물과도 같다. 책에 담긴 일곱 사람을 만날 때(이기호의 네 번째 소설집인 이번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고유명사가 포함된 제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독자는 키득거리며 책을 붙잡고 있다가도 문득 자신의 가슴께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오는 순간을 맞이한다. 소설들을 어떤 순서로 읽어봐도 나름의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은 되도록 첫 번째로 배치된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시작해 책이 구성된 차례대로 읽기를 바란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쓴 소설이 중고품 구매 사이트에 싼 가격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그때부터 온갖 생각에 시달리는 소설가 ‘이기호’가 등장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독자 처지에서는 작가가 먼저 무장해제를 하고 이야기 세계에 입성한 것으로 여겨져서다.

이번 소설집에서 거듭 등장하는 소설 쓰는 ‘이’가 곧 소설가 ‘이기호’이고, 소설은 작가의 경험담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굳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때의 효과일 테다. 이기호 소설의 관심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잘 살아보겠다고 서로를 향해 주고받는 언어, 혹은 하나의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조명하는 언어와 같은 것이 빈번히 진실을 놓치는 모양새로 자리하는지에 있다. 그 진실이 사소한 말, 안다고 자부했으나 알 수 없을 누군가의 영역, 내가 나를 변명하기 위해 마음껏 행했던 자기기만을 이음새 삼아 드러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기호의 소설은 진짜 같은 가짜 속에서 가짜나 다름없는 자기 자신을 통해 기어이 진짜를 건네는 방식을 감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만큼이나 솔직함에 모든 걸 다 건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소설을 막 읽은 뒤 나는 어쩐지 서늘한 마음이 되어 책을 앞에 두고 오래도록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최은영의 소설을 향한 다정한 찬사에 언급되는 ‘선하다’는 표현을 두고 생각에 잠기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바깥에 적을 상정하여 혐오를 투사함으로써만 겨우 자기 존재의 지탱이 가능한 이들에 대한 소식이 뉴스를 장식하는 시대에 소설이 남긴 선한 인상은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인가. ‘선함’이란 말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강요되고 있는 성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혹은 그 누군가를 ‘싸울 줄 모르는 상태’로 길들이기 위해 꺼내든 당근에 해당하는 표현임을 인지한다면, 그때도 선함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쓸 수 있을까.

최은영은 그 선함이라는 말이 어떤 인물에게 부여되는 순간, 그가 세상에 받아들여지기까지 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짚어내는 작가다. 요컨대 최은영의 소설에서 인물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왜 지금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는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살핌으로써, 자기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어긋났던 관계까지도 제대로 바라보려 한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을 떠올릴 때 으레 형성되는 관습적인 형상화 역시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 꼬여 있지 않은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는 일은,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징그러운 진실마저도 눈을 맞춰야 하는 고통이 뒤따를지언정,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존립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절차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폭력적인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처절하게 스스로와 투쟁한 시간의 기록이다. 이 고요한 싸움의 과정을 통해서야 들리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설 속 어린 인물들이 견뎠던 시간이 마냥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이만큼이나 집요하게 성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발을 딛고 서 있으려는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소설을 막 읽은 뒤 나는 어쩐지 사무치는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을 오래도록 안아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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