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라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범죄지 관할 경찰서에서 사건을 담당한다. 주로 여성아동청소년수사팀(이하 여청팀)이 맡는다. 여청팀은 ‘그나마’ 경찰서 내에서 성 인권 감수성 수준이 높고 수사 당사자를 최대한 배려하고자 노력한다.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의뢰인들과 함께 경찰서를 참 많이도 다녔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 과거에는 여청팀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최근에는 여청팀만큼이나 경제팀을 왔다 갔다 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각종 고소·고발이나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 때문이다.
무고죄나 명예훼손죄는 여청팀이 아닌 경제팀에서 다룬다. 성폭력을 둘러싼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무고나 명예훼손의 근간이 되는 사안이 성폭력인데, 해당 사안들과 그 당사자들을 수사하고 다루는 주체는 여청팀이 아니라 경제팀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 ‘내가 피해자네’ ‘네가 가해자네’ 주장하는 당사자들과의 소통이나 사안을 다룸에 있어 많은 온도차가 발생하고, 폐해와 상처는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 된다.
지난 여름 찾아온 20대 중반의 한 여성은 협력업체 대표에게 입은 성폭력 피해를 고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는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피해자가 눈물을 쏟으며 가해자에 대한 판결문을 꺼내놓았다. 대강의 내용은 피해자나 피해자 주변인의 진술이 엇갈려, 각자 가해자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때문에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오면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설명을 했다. 그럼에도 항소심에서 피해자의 입장이 좀 더 반영된 판결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안내했다.
얼마 전 그녀가 다시 찾아왔다. 항소심에서 가해자가 다시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무죄판결을 받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증언을 해준 피해자 지인을 대상으로 무고·위증의 혐의로 고소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항소심 판결문은 1심 판결문보다 피해자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딱히 무고나 위증으로 기소될 것 같지 않았다. 조사받을 때 소명할 내용들을 안내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피해자는 조사를 받으러 다녀올 때마다 울면서 나에게 전화했다. 피해자는 수사를 받으며 혼자 조사받기 어려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고, 변호사 선임을 원했다. 나는 사건을 맡자마자 해당 경찰서 청문감사관실에 진정을 해서 경제팀 안에서나마 젊은 여성 경찰관으로 수사관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역고소 사건, 누가 맡아야 할까
형사 피고인에 대한 무죄 추정의 원칙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회적 지위나 법적 입지는 가해자에 비해 열악하다. 그런 현실에서 피해자가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세상에 꺼낸 피해 사실이 늘 좋은 결과를 낳기는 쉽지 않다. 가해자에 대한 불기소 이유서나 판결문의 판단 이유는 그 결과만큼이나 이후 피해자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합법적인 2차 가해(고소· 고발)를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이들 가운데 억울한 사례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의 고소권을 그것이 성폭력 혐의였다는 이유로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거듭 깊은 수렁으로 빠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방안은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여청팀 인력을 증원해서라도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역고소 사건까지 맡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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