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6월, 학생들이 지치기 시작하는 때다. 3~4월에는 열심히 공부해 성적을 올려보겠다며 에너지를 분출한다. 중간고사를 보는 5월, 모두가 달리는 레이스에서 심장이 터지도록 무리하지 않으면 절대 순위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의고사를 마친 6월, 내 위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지 알게 된다.
할 일이 너무 많으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기말고사가 지나면 언론은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학생들은 이미 지쳐 나가떨어졌다. 온 세상이 1·2등급을 위한 레이스이고 자신은 1·2등급 밑을 받치고 있는 ‘퇴적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학생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무중력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매년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워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피해왔다. 올해는 피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 수업을 맡았다. 이번 지방선거 때 이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내가 지지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후보를 밀어줄 수 있는 힘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경험한다면? 경쟁이 옭아매는 철옹성 같은 제도에 얼마나 적응했는지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학생들이 한 번쯤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학생들이 ‘무중력 상태’를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 투표권 획득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투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학생들에게 나는 사과했다. 청소년 투표권을 끝까지 반대하던 정당(이번 지방선거 때 참패를 당했다)은 이런 논리를 내세웠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투표를 하면 학교와 사회가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의 교복을 빌려 입고 투표에 참여했다. 나처럼 지방선거에서 18세 선거권을 도입하자고 외치던 사람들이 모두 ‘교복 입고 투표하기’ 캠페인에 참여했다.
학생 사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
투표 전에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 설문조사 결과 가장 지지를 많이 받은 서울시장 후보는 신지예 녹색당 후보였다. 녹색당의 존재도 잘 모르는 학생이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신 후보가 1위를 했는지 다소 의아했다. 학생들에게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지금 시장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뭐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아요. 그런데 신지예 후보는 페미니스트라는 말만 해도 욕먹는 상황에서 선거 포스터에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잖아요.” “우리 댕댕이(반려견)를 위한 정책이 많아서요.” “지하철에서 몰카범을 신고했더니, 교복 입은 어린 게 경찰서에 신고나 한다고 뭐라 하더라고요. 저는 이런 게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꽉 끼는 교복을 입고 투표하며 내 몸이 꽉 조여지는 만큼 사회가 ‘교복을 입은 신체’를 얼마나 꽉 조이고 있는지 실감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이렇게 억압적인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은 어떨까? 범죄를 신고하는데도 범죄 피해자로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교복 입은 어린 것’으로 대접받는 사회적 차별이 학생들로 하여금 신지예 후보에게 표를 던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학생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루뭉술하게 모두를 위한 정책에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자리는 없다는 것을, 무엇이 문제인지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그나마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선거 결과는 이 학생들의 이런 바람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까? 만약 이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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