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해는 부지런하다.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이미 환한 바깥에 사미 씨(28)와 아파크 씨(26) 부부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으로 잠을 설친 터였다. 사미 부부가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준 홍 아무개씨 역시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6월18일 오전 6시40분, 홍씨는 둘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제주출입국·외국인청으로 향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예멘 난민을 대상으로 한 2차 취업설명회가 예정돼 있었다.

이 부부는 5월1일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2017년 11월 내전 중인 예멘을 떠난 이후 7개월 동안 5개국을 떠돌았다. 사우디아라비아·수단·에티오피아·싱가포르를 거쳐 말레이시아에 짐을 풀었지만, 이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난민법이 없고 난민협약에 가입되지 않은 말레이시아에서도 역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부부는 예멘과 비슷한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로 가기 위해 비자를 알아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 사미 씨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아내 아파크 씨에게는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의 제주가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도시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시사IN 이명익6월18일 예멘인 사미 씨(왼쪽)와 아파크 씨 부부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열린 2차 취업설명회에 참석했다.


제주는 국제적인 관광도시를 목표로 2002년 5월1일부터 무사증(무비자) 제도를 도입했다. 도입 당시 22개국은 제외됐지만(2006년 11개국으로 축소), 제외국 목록에 예멘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6월1일 예멘은 무비자 관광이 불가능한 나라 중 한 곳이 되었다. 지난해 12월 말레이시아와 제주 간 에어아시아 직항이 생긴 이후부터 6개월간 사미·아파크 부부를 포함한 예멘인 561명이 차례로 입국하자 놀란 법무부가 내놓은 ‘대책’의 일환이었다. 유입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보다 한 달 전쯤인 4월30일에는 예멘인들이 제주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하는 출도제한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제주로 입국한 예멘인 561명 중 519명이 난민 신청을 했지만,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난민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하다. 난민법 제40조 2항에 따라 난민 신청자는 6개월 동안 구직 활동도 할 수 없다. 그사이 제주 시내 10여 개 관광호텔에 흩어져 머물고 있던 예멘인들은 수중에 지닌 돈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취업에 필요한 외국인등록증을 받기 위해서는 인지대 10만원과 수수료 3만원을 포함해 13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발급까지 2주 이상 걸린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예멘 난민들의 소식을 접한 제주 내 미국·캐나다 출신 원어민 교사와 종교단체들이 먼저 개인 자격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모금과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숙박비가 떨어져 호텔에서 쫓겨나기 직전이었던 사미·아파크 부부도 캐나다 원어민 교사가 다니던 성당 지인을 통해 한국인 부부 집에 머물 수 있었다. 한국난민네트워크 등 NGO들도 긴급히 제주예멘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꾸리고 현황 파악 및 지원에 나섰다.

 

ⓒ시사IN 이명익6월18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 취업설명회에 참석한 예멘인들이 고용주 주변에 모여 있다.
주로 수산업·양식업 일자리가 많이 나왔다.


이들의 노력 끝에 6월14일과 18일 ‘특별 허가’ 방식으로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취업설명회가 열렸다. 다만 취업 가능한 업종은 수산업·양식업·요식업 등으로 제한됐다. 6월18일에도 한 제조업체 취업 담당자가 이들을 고용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제조업은 내국인 우선 채용 업종이라는 이유였다. 이 제조업체 담당자는 “채용 공고를 아무리 내고 시급을 올려봐도 한국인은 지원 자체를 하지 않아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무척 아쉽네요”라고 말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제주출입국·외국인청 1층 바닥에 주저앉아 면접 차례를 마냥 기다리고 있던 아파크 씨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예멘 서남쪽 도시 타이즈에서 나고 자랐다. 2012년 대학에 입학해 임상병리학을 공부했다. 2014년 내전 이후 모든 미래가 사라졌다.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쯤 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것 같아요. 뱃속의 아이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파크가 ‘만약’을 이야기하며 남편을 지그시 바라봤다.

두 사람은 예멘과 국경을 마주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피란민으로 만나, 2016년 1월 결혼했다. 다시 예멘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은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사미 씨는 임신한 아내를 대신해 급한 대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각종 배달 업무를 했다. 이마에 세로로 길게 파인 상처도 배달 중 발생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017년 11월 사달이 났다. 사미 씨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던 형이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총 여러 발을 맞았다. 그의 등 뒤에서, 형은 손 쓸 틈도 없이 숨을 거뒀다. 이후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못한 그는 결심했다. 아내와 예멘을 떠나기로 했다. 여러 나라를 떠도는 동안 아이도 유산됐다. 말레이시아에서 터키행이 좌절된 후 한국행 비행기 표를 구하기 위해 부부는 결혼 예물을 팔았다. 

수산업·양식업을 위주로 한 6월14일 1차 취업설명회에서 부부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일을 해야 해요. 다른 건 어렵지 않아요. 다만….” 아파크가 다시 잠시 숨을 골랐다. “저희는 둘이 같이 가고 싶어요.” 수산업·양식업종 고용주들은 여성을 원하지 않았다. 배를 타기에 여성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 외에도 여러 명이 숙식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부부에게 별도의 방을 내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고용주는 없었다. 요식업을 위주로 한 6월18일 2차 취업설명회가 마지막 기회였다. 이날도 고용되지 못하면 개별적으로 취업을 알아봐야 했다.

 

ⓒ시사IN 이명익6월19일 중문 관광단지 내에 있는 식당에 취업된 사미 씨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다행히 여러 식당 주인이 아내에게 관심을 보였다. 요식업 고용주 다수는 여성을 원했지만 예멘 난민 중에는 여성이 드물었다. 난민 대다수가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예멘을 떠난 20~30대 남성이다. 대책위에 따르면 16~17세 청소년도 두 명 있다. 예멘 수도 사나에 위치한 사바 대학 학생증을 자랑스럽게 꺼내든 마지(21)는 이렇게 말했다. “반군도 정부군도 똑같아요. 전쟁을 거부해도 죽고, 거부하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청소년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열 살만 돼도 군대에 끌려간다고 들었어요.”

청사 로비에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한 틈에 한 식당에 아파크의 취업이 결정됐다. 그녀는 남편의 팔을 이끌며 식당 주인에게 남편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남자는 인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좀 무섭게 생겼어”라며 고용주가 기자에게 한국어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를 할 수 있는 아파크와 달리 사미는 아랍어만을 구사한다. 아파크가 기자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저분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우리는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전해주세요. 히잡도 벗을 수 있고 일하는 시간에 기도도 하지 않겠다고 얘기해주세요. 돼지고기만 빼면 한국 음식도 잘 먹어요.” 고용주는 결심한 듯 “이것도 운명이지 뭐”라며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식당으로 향했다. 둘은 중문 관광단지 내 50m 정도 떨어진 식당에 각각 취업됐다. 고용주들은 식당 뒷골목에 위치한 펜션을 장기 렌트해 두 사람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고 오전 8시45분에 출근해 밤 9시까지 일하는 조건이다.

제주 내 보수 단체 모임은 ‘무사증 폐지’ 주장

6월19일 점심때쯤 부부가 첫 출근한 식당을 찾았다. 사미 씨가 일하는 식당은 흑돼지구이 전문점이었다. 식당 매니저는 사미가 밥을 너무 조금 먹는다고 걱정했다. 식당 주인은 휴대전화에서 번역기 앱을 열어 이렇게 썼다. “일이 많이 힘들어. 밥 많이 먹어야 기운이 나지. 한국어도 얼른 배워. 한국어 할 수 있게 되면 월급도 올려줄게.” 사미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웃었다.

국수전문점에서 히잡과 차도르를 벗고 빨간 머릿수건과 검정 앞치마를 두른 아파크는 점심시간을 앞두고 인사법을 배우고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 그러니까 ‘하이(Hi)’ 해야 하잖아. 그게 ‘안!녕!하!세!요!’야.” 식당 매니저의 목소리가 ‘안녕하세요’에서 잠시 높아졌다. 아파크가 서툴지만 또박또박 다섯 글자를 곧잘 따라 발음하자, 매니저가 칭찬을 잊지 않았다. 이어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어서 오세요’ 등 짧은 수업이 이어졌다.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간 빈 그릇을 치우는 아파크의 손길이 야무졌다.

 

ⓒ시사IN 이명익6월18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 취업설명회를 찾은 예멘인들이
점심 기도를 올리고 있다.


5월31일 제주 내 보수 단체 모임은 ‘불법난민 대책촉구집회’를 열고 무사증 폐지를 주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 내 이슈였던 난민 문제는 6월15일 난민 수용 거부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이 올라오며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청원 일부는 삭제됐지만, 비슷한 내용의 게시물은 여전히 200여 개가 넘는다. 그중 ‘예멘인들의 제주도 난민 신청에 대해 불허하고 제주도 무사증 입국제도를 폐지하라’는 내용의 청원은 일주일 만에 32만명이 서명했다.

사미와 아파크 부부가 취업 전까지 임시로 머물 수 있게 방 한 칸을 내줬던 홍 아무개씨는 인터뷰 중 난민 반대 여론에 대해 이야기하다 잠시 울먹였다. “전혀 몰랐다가 너무 놀랐어요. 제가 빌라에 사는데, 공동주택이다 보니까 갑자기 이웃들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혹시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싶어서. 그게 또 아파크 부부에게 미안하고.”

홍씨는 차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예멘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부부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알고 있어야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당부를 하긴 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해맑게 되묻는 아파크에게 홍씨는 한국 사람들이 모든 외국인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고 답했다. “솔직히 미군이나 원어민 교사들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백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거나 한국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잖아요. 걱정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주 한림에 사는 하현용씨 부부도 예멘 난민 가족 7명을 위해 자신의 집 일부를 내줬다. 이웃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이 예멘 난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부러 와서 아이들 사진을 찍어가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등 무례를 경험했다. “이분들은 저한테 난민 이전에 손님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예멘인들이 난민이 아니라 테러범이면 어쩔 거냐고 하는데, 기사 댓글 보셨죠? 그게 테러 아닙니까.”

하씨 집에 머물고 있는 자말 씨(42)는 예멘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여파로 살레 대통령이 퇴진하며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전쟁이 발발했고, 아내 나자 씨(42)와 다섯 딸을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말레이시아로 데려왔다. 말레이시아에서의 망명 요청은 번번이 거절됐다.

결국 자말 씨 부부도 한국행을 택했다. 무엇보다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아티스트를 꿈꾸는 누라(19), 과학자를 원하는 살로아(18), 건축 설계를 하고 싶어 하는 수마야(17), 노래를 잘하는 파티마(11), 그리고 막내 후다(8)까지 말레이시아에서는 학교를 보낼 수 없어 홈스쿨링으로 대신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아이들의 미래가 너무 걱정됩니다. 제 딸들이 학교에 가고 과학과 역사와 예술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지금 예멘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입니다.”

10대인 누라, 살로아, 수마야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살로아는 3월8일 여성의날에 올린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여주었다. 여성 과학자들의 사진 여러 장과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모든 훌륭한 여자는 부모 뜻을 거스른다. 오늘은 세상 모든 여성에게 행복한 날.” 3월14일에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추모하는 글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자말이 말을 이었다. “한국도 전쟁을 경험했던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쟁이라는 실수로부터 벗어났지만(회복됐지만), 불행히도 예멘은 전쟁을 중단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한국 정부에 저와 제 가족의 안전을 요청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정부는 예외적으로 자말처럼 자녀가 있는 경우에 한해 출도제한 조치를 풀었다. 자말 씨 역시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의 허락이 떨어지면 서울로 갈 예정이다. 자말도 1차 취업설명회 때 참가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예멘 난민 중에는 자말 외에도 다양한 직업과 기술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난민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단순 노무직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예멘 난민 150여 명 이상이 머물 수 있도록 숙박료를 깎아주고 식당을 쓸 수 있게 열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올레관광호텔 김우준 대표도 그 지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예멘 들어본 적 있어요? 난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영어도 곧잘 하고 주특기가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셰프도 있고, 엔지니어도 있고, 기자도 있고, 독일 유학 다녀온 이도 있고…. 그런 예멘인들도 다 배를 타러 갔다고. 이 사람들은 공단 같은 데로 가고 싶어 하는데, 제주 밖으로는 못 나가게 하고 여기 1차, 3차 산업밖에 없잖아요. 취업됐다가 벌써 돌아온 친구도 있어요. 그 친구가 와서 그래. ‘보스 크레이지!’ 말은 안 통해도 욕하는 건 또 다 알아들어요. 예멘 사람만 교육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바뀌어야 해요.”

1992년 난민협약과 의정서 비준

2차 취업설명회가 끝난 6월18일 저녁, 올레관광호텔 지하 식당도 한산했다. 미처 취업하지 못한 몇 명만이 남아 식빵과 스크램블 에그로 저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청년(23)이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취재진에 선뜻 내줬다. 함께 모여서 같이 북·미 정상회담을 봤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미스터 킴(김우준 대표)이 한국도 전쟁했던 나라라고 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회담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잘 될 거 같다고, 예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요. 저도 그래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웃음).”

 

 

 

 


한 달 넘게 예멘 난민과 부대끼는 동안 김 대표도 정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2명만 잘 수 있는 방에 5~6명씩 와서 자고 있으면 내쫓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예멘 난민이 이 호텔에 많다는 사실을 알고 대신 숙박비를 내주겠다고 오는 외국인과 구호품을 들고 오는 한국인도 많았다. 덕분에 숙박비를 다 내지 못하고 취업된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 있었다. “고용주들이 호텔 앞에 쭉 차를 대놓고 짐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날 내가 잠을 못 잤어. 어쩐지 팔려가는 거 같더라고. 이거 참 노예시장이 따로 없네, 싶기도 하고. 내가 그랬어. 일이 쉽고 돈 많이 주는 건 한국인이 다 하고 있으니까, 당신들이 예멘에서 뭘 했든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한국 역사는 난민의 역사이기도 하다. 상해임시정부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정치적 난민들이 만든 정부다. 유엔난민기구의 전신인 운크라(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역시 한국전쟁 당시 난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다. 제주 4·3 사건 당시에는 1만명이 넘는 제주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난민으로 살았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과 의정서를 비준하고, 1993년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면서 난민 제도를 정식으로 도입했다. 2013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난민 인정 심사 기준이 무척 까다로운 나라이기도 하다. 2017년 기준, 난민 인정률은 4.1%다. 지금까지 4만470명이 난민 지위를 요청했지만 난민 인정자는 839명에 불과하다.

난민 신청을 하면 제공된다고 알려진 생계비 역시 예산 부족으로 전체 난민 중 3% 정도만 받을 수 있다. 6월19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사 공무원이 예멘 난민들을 모아두고 강조한 말 중 하나도 “여러분, 잘 아셔야 해요. 생계비는 신청한다고 다 주는 게 아니에요.” 예멘 난민에게 생계비가 지급된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다. 알려진 것과 달리 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은 43만2900원이다.

김성인 제주예멘난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제주 예멘 난민 유입을 계기로 한국 사회가 난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난민이라고 하면 흔히 난민캠프나 보트피플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워요. 지금 제주에 들어와 있는 난민을 그런 ‘이미지’로 사고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분들은 이미 지금 사회 안에 들어와 있어요.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한국 사람이 나쁘거나, 예멘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모르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 갈등은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아주 사소한 다툼도 위기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개입해야 해요. 어쩌면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자말 씨 가족을 임시 보호하고 있는 하현용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경험적 답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답을 채점하는 사람들은 물론 예멘인을 비롯한 난민들이겠지요.” 예멘 난민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한국 사회의 실력이 달렸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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