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건네받은 얼굴이 잠시 환해졌다. 가던 길을 부러 돌아와 명함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6·13 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 마지막 날인 6월12일 오전 8시, 서울 노원구 지하철 4호선 상계역 앞. 한 시간 남짓 유세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명함을 내미는 손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시박(어차피 시장은 박원순).’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선거나 마찬가지였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 굵직한 이슈에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6명이나 되는 군소 후보가 서울시장직에 도전했다. 신 후보도 원외 정당인 녹색당이 내놓은 군소 후보 중 한 사람이었다. 선거 초반 ‘이색 후보’로 반짝 조명을 받기는 했다. 스물일곱 살, 여성, 비혼인 역대 최연소 시장 후보자.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세운 후보.

‘반응’은 후보나 캠프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왔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직후부터 13일간 벽보 27개와 현수막 2개가 훼손됐다. 신 후보 사진을 날카로운 기구로 긁어내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식이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벽보나 현수막 등을 훼손·철거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4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경찰 수사는 더뎠다. 선거운동 기간 중 후보가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따로 열어야 할 정도였다. 한 남성 변호사는 신 후보의 포스터를 두고 “시건방지고 오시한 눈빛이다.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라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가 6월12일 서울 숙명여대 앞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신 후보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단단해졌다. “‘가슴을 도려내고 싶다’ ‘쇠파이프로 머리를 내려치고 싶다’ 같은 사이버 불링(사이버 공간에서 집요하게 괴롭힘)도 엄청났어요. 지지자 분들이 느끼실 공포가 걱정됐어요. 페미니스트 라고 밝히면 이런 공격을 당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실까 봐. 저는 오히려 ‘아, 이래서 정치에 페미니즘이 필요하구나’를 느꼈어요. 우리가 특정 성별과 싸우는 게 아니라 혐오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유권자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랐어요.”

유세 현장에는 아예 후보 일정을 미리 숙지하고 기다리는 유권자들이 많았다. 한 학생 무리는 신 후보를 발견하고 함성을 지르더니 갑자기 멈춰 서 립글로스를 다시 발랐다. 쪼르르 다가온 세 친구는 신 후보와 얼굴을 맞대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높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명함에 후보 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진풍경이 여러 차례 펼쳐졌다. “수업 ‘째고’ 왔어요”라며 호탕하게 웃던 한 학생은 “우리 시건방진 표정으로 찍어요”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생은 신 후보에게 편지를 전하며 눈물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페미니스트이고, 성 소수자이고…. 그런데 제 존재는, 제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은 늘 ‘다음에’로 미뤄졌거든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해결해야 한다고 앞장서 말해주는 정치인이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요.”

선거운동 전부터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에 대해 당 안팎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민감한 주제를 다루기보다 적당하게 ‘보통 선거’를 하자는 말도 들었다. 신 후보는 한국 녹색당은 물론 한국 녹색당이 가입돼 있는 글로벌그린즈(세계 녹색당) 강령에 성 평등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낙태죄, 불법촬영 범죄, 미투 등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 단 한 사람의 여성 후보도 공천하지 않았어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선거가 값지게 쓰이려면 페미니즘 이슈를 전면에 내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약자와 소수자를 단지 선거 ‘승리’를 위해 삭제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이번 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 선거비용 제한액은 34억9400만원이었다. 신지예 후보는 모두 1억6500만원을 썼다. 선거비용은 15% 이상 득표해야 보전된다. 1.7%를 득표한 신 후보는 선거비용을 보전받지 못하지만 당원과 시민의 후원 덕분에 ‘빚 없이’ 치렀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기적을 만났다. 후보 등록을 하려면 기탁금 5000만원을 내야 하는데 등록 전날까지도 돈이 부족했다. ‘우리 그냥 하지 말까’, 후보와 캠프의 낙담도 잠시였다. 다음날 아침 통장에는 기탁금만큼 돈이 채워져 있었다.

8만2874표…부인하기 힘든 ‘값진’ 4위

물론 돈은 늘 부족했다. 서울 시내에 모두 800개까지 걸 수 있는 현수막을 200개밖에 걸지 못했고, 공보물 역시 낱장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기회도 공정하지 못했다. 선관위는 마지못해 군소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를 한 차례 열어줬다. 대신 크고 작은 도움이 답지했다. 유세차로 쓰라며 전북 장수에서 트럭이 올라왔고, 캠프로 쓰라고 공간을 내주는 사람도 만났다.

그 힘이 모여 8만2874표를 일궜다. 원내 정당인 정의당 후보를 제친, 부인하기 힘든 ‘값진’ 4위였다.

신 후보는 중학교 때 두발 자유 운동을 했다. 싸우는 과정에서 두발 ‘자율’을 얻어내긴 했는데, 자율의 범위를 협의하는 과정이 결국 학부모와 학교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을 바꾸려면 학교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에는 ‘내가 행복한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사회적 기업을 거쳐 3D 프린트 업체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결국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법이나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2012년 월 3000원을 내는 녹색당 당원이 되었다. 추첨으로 대의원을 뽑고, 여성과반대표제가 중요한 원칙으로 작동하는 녹색당의 토양 안에서 2017년 12월, 신지예씨는 전 당원 투표로 서울시장 후보에 선출된다.

6월12일 마지막 유세에서 신 후보는 이렇게 호소했다. 대외적으로는 5%가 목표라고 했지만, ‘한계’마저도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여러분은 제 득표율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페미니스트가 승리할 거라는 걸. 아마 30년쯤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될 때까지 페미니스트 합시다.”

녹색당은 이번 선거에서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무명이었던 ‘정치인’ 신지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번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당선자 평균연령은 61세다. 한국 YMCA와 ‘18세 참정권 실현을 위한 6·13 청소년모의투표 운동본부’가 지방선거 당일 진행한 서울시장 모의선거에서 신지예 후보는 박원순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90년생 신지예’는 이번 선거가 남긴 미래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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