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11 이자람

사람의 목소리는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악기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에 사람의 목소리만큼 적합한 악기는 없다. 그래서 목소리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이자람은 열한 살 때부터 쉬지 않고 판소리를 해왔고, 1999년 스무 살 최연소의 나이로 8시간 동안 춘향가를 완창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희곡을 판소리 극으로 재해석한 ‘사천가’와 ‘억척가’ 등 그의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섯 살 때 부른 창작 동요 ‘예솔아’로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지만 그는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의 이수자로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로 등재되었다. 동시에 2005년부터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로 포크를 기반으로 한 록 음악을 들려준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동서양 창법을 넘나들면서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껏 쉼 없이 달려오던 판소리를 잠시 쉬며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두 번째 정규 음반을 준비 중인 이자람씨를 만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합뉴스이자람(위)은 열한 살 때부터 판소리를 해왔다.
그는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두 번째 정규 음반을 준비 중이다.

이기용:판소리와 밴드 음악을 넘나들며 엄청난 창작력을 보여왔는데 악보를 못 본다고 들었다.

이자람:서울대 음대를 나왔는데도 악보를 못 본다(웃음). 나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몸과 성대를 이리저리 훈련해왔다. 그래서 귀와 눈으로 보고 따라하는 게 악보를 보는 것보다 내겐 더 빠르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악보를 못 보게 됐다.

이기용:이자람씨의 판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자람:‘어떻게 저 작은 몸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나’ 하는 것이다(웃음).

이기용:서편제 같은 소리를 들어보면 그 깊은 회한을 다루는 목소리가 놀랍다. 판소리 외에 아마도이자람밴드라는 록 밴드도 하고 있는데, 두 창법 차이를 설명한다면?

이자람:말로는 어렵지만 이렇게 비유하면 비슷할 것이다. ‘판소리하는’ 나와 ‘밴드 하는’ 내가 옷을 갈아입은 느낌이다. 나는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에 따라 그날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고 손짓이나 행동도 달라진다. 내 안에서 어떤 시스템이
이 가사·노래·음정에는 이게 가장 좋은 거니까 이걸 쓰라며 건네주는 것 같다.

이기용:아마도이자람밴드의 ‘크레이지 배가본드’ 앨범은 천상병 시인의 시로 만들어졌다.

이자람:천상병 시인의 시를 앨범으로 발표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1년쯤 고심했다. 그러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천상병이란 사람이 좋아졌다. 언어 자체를 순수하게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이 나와도 맞아서 작업하기로 마음먹으니 또 너무 편했다.

이기용:지금의 아티스트 이자람을 만든, 음악적으로 특별히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나?

이자람:마당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진짜 많았는데 그게 정말 좋았다. 담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면 노래를 불러주면서 마당에서 혼자 퍼포먼스를 많이 했다. 그리고 옆집 개랑 발성 연습하듯이 서로 짖으면서 정말 많이 싸웠다(웃음). 또 하나는 어린 시절 ‘예솔이’를 부르고 다닐 때다. 노래하러 방송국에 가면 ‘너는 예쁘지는 않지만 노래를 참 잘한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예쁘지는 않지만 참 잘한다’는 한국식 어법이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했어야 했다. ‘나는 진짜 잘해, 나는 최고야’라면서. 나를 누르고 평가하는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좀 많이 억압했던 것 같다. ‘나는 못생겼으니까 더 잘해야 돼’와 같이 단순한 것들. 그렇게 산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

이기용:오랫동안 창작 판소리 사천가와 억척가를 해왔는데 최근에는 밴드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이자람:아는 언니가 작년 11월에 ‘잘 지내냐’며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걸 얼마 전에 확인을 하고, ‘그때 나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고 답을 보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사천가, 억척가를 하던 단체의 오랜 수장이었다. 그런데 그때 말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일이 겹치면서 단체를 그만두게 됐다. 많이 힘들었다. 무대에서 손이 굳어버린다거나 공황장애 같은 것들을 겪었다. 지금은 꽤 괜찮아졌다.

이기용:어떻게 극복했나?

이자람: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하거나 떠나지 못하거나 떼어내지 못하는 모든 두려움의 끝은 ‘혼자 비참하게 늙어 죽을까 봐’로 향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혼자 늙어 죽으면 뭐 어때’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이기용:사천가와 억척가를 이제 안 한다는 것인가?

이자람:하고 싶으면 해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지금은 밴드에 집중하고 싶고 2년쯤 후에 다시 판소리계로 돌아오면, 그때 혼자서 새 작품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이기용:‘판소리는 내가 겪은 수많은 장르 중에서 가장 완벽한 장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

이자람:세상은 훨씬 넓은 것 같아서 가장 완벽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소리는 일단 기술적인 부분이 어마어마하다. 몸으로 훈련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 정말 많다. 극본을 직접 쓰고 언어를 다루기 때문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 이것은 연극이기도 하다. 판소리는 무대에 선 내가 시시각각 등장인물들로 갑자기 변해서 노래하고 연기해야 한다. 관객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각 파트에서의 능력치가 엄청 높아야만 한다. 그래야 완벽해지는 예술이다. 내가 분장실에서 얼마나 명상을 잘 하느냐에 그날 공연이 좌우될 정도로 한 사람이 퍼포머(performer)이자 창작자일 때 권력이 확 쏠리게 된다. 참 고약한 예술인 것 같다.

이기용:판소리를 위해 많은 시간 애써왔다. 지금 본인에게 밴드의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

이자람:아마도이자람밴드가 내 인생을 살렸다. 그래서 밴드가 대체 뭔지 생각하게 된다. 판소리를 할 때의 나는 정말 온전히 혼자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는 어떤 모델이 되었다. 공연계에 한 획을 그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웃음). 공연계에서 나는 노블레스였다. 아무도 없는 나의 정원. 그게 좋기도 하지만 정말 막막하다. 그런데 밴드계에서 나는 천민이다(웃음).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고, 본보기도 많아 재미있다. 판소리는 그런 것이 정말 없다. 함께 동병상련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밴드를 하는 게 나에게는 정말 좋은 것 같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자람이 가진 자신의 음악에 대한 건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그에게 목소리란 뮤지션의 모든 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매개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지금껏 쉬지 않고 올림픽 선수처럼 달려왔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모처럼의 휴식 중에 만든다는 아마도이자람밴드의 새 음반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크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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