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장의 무기’를 지니고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 임했다. 회담 마무리 시점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여준 4분30초 분량의 짧은 동영상이다.

ⓒAFP PHOTO북·미 정상회담 이튿날 평양 지하철역 신문 게시대에 뉴스를 보려는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기회의 문들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곳. 전 세계의 투자, 의학적 난관의 돌파, 풍성한 자원, 혁신적 기술, 새로운 발견이 있는 곳.… 이 지도자(김정은)는 조국의 개변을 선택할까요? 그래서 새로운 세계의 성원이 될까요? 조국 인민들의 영웅이 될까요? 그는 평화와 악수를 할까요? 그리고 전대미문의 번영을 누릴까요?”

핵·미사일과 경제적 번영을 바꾸라는 요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지속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매우 부유해질(very rich) 것이라고 여러 차례 되풀이해왔다. 북한은 1인당 소득이 한국의 3% 정도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다. 단지 경제제재 때문만이 아니다. 공업 생산설비나 농업생산성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 다만 전문가들 대부분은 북한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국가 비전을 ‘군사적 자주화’에서 경제 건설로 전환한다면 비약적 발전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 더욱이 동아시아에는 짧은 기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뤄낸 한국, 중국,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있다. 북한도 부유해질 수 있을까?

 

거의 모든 국내외 전문가들은 북한이 농업과 공업에 시장 원리를 도입해야 생산성을 높이고 산업을 고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예컨대 농업의 경우, 협동농장에서 개별 농가로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넘겨야 한다. 개별 농가들이 수확물 가운데 상당 부분을 분배받고 자유롭게 처리(시장에 판매)할 수 있어야 열심히 일할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업 부문에서도, 경영자가 국가 명령을 받들기보다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잘 팔릴 품목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거나 유능한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치도 필요하다.

친시장적 개혁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초·중반의 대기근(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생산·분배 기능이 중단되자 인민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았다. 이런 와중에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엄연한 불법인 시장이 급속히 발전해버렸다. ‘돈주’로 불리는 민간 자본가들이 활발하게 영리 활동을 전개 중이며, 심지어 국영기업 등 국가 부문과 암암리에 협력 중인 정황도 나타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시장과 자본가를 공식적으로 인정(법제화)해주면 된다.

실제로 그는 2011년 권력을 승계한 직후 이른바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을 통해 협동농장과 국영기업에 시장 원리를 대거 불어넣었다. 사실상 가족 단위의 개인 영농을 육성하고 국영기업 경영진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북한의 농공업 부문에서 이미 공식·비공식 시장이 작동하고 있다. 법제화는 북한의 시장경제를 제 발로 일어서게 만들 것이다.

농공업보다 더 급속한 성장을 이룰 것으로 보이는 산업도 있다. 바로 서비스업이다. 북·미 정상회담 직후 〈뉴욕타임스〉는 ‘누가 북한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 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의 서비스업 열풍을 소개했다.

북한 서비스업 급속 성장 가능성  

ⓒAFP PHOTO글로벌 자본주의 미개척지인 북한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나라다. 아래는 평양 시내.


최근 북한을 방문한 이언 콜린스라는 컨설턴트는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비즈니스 관련 워크숍을 열었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 여성들이 자기 집 침실을 시간 단위로 연인들에게 대여하고 수수료를 받는 사업을 막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콜린스는 ‘앱스토어’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북한의 앱스토어는 스마트폰 안에 있지 않다. 벽돌로 건축된 ‘물리적인’ 상점으로 존재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가서 특정한 앱을 깔아달라고 요구하면 점원이 업로드해주는 것이다. 이렇다 할 밑천을 갖지 못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들이 수익의 기회를 서비스업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경제 전문가인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USCD) 석좌교수는 최근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칼럼에서, 북한 국가가 친시장 정책을 펼치면 민간 서비스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리라 내다봤다. “이미 식당업, 수송업, 소매업 같은 소규모 비즈니스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개혁이 추진되면 건설업, 운송업, 심지어 금융과 통신 부문에서도 더 큰 규모의 기업이 등장할 것이다.”

국내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북한은 경제에서도 자주를 추구해온 국가다. 현대사회에서 무역 없이 부유해진 나라는 없다. 경제발전 수준이 높지 않은 북한이 무역에서 성공하려면 해외의 기계 설비, 기술, 금융 노하우 등의 자원을 대거 끌어들여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다.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도 생산 가능한 원자재와 농산물, 경공업 제품을 수출해 벌어들인 외환으로 기계 설비 등을 매입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 유치다. 개성공단이 성공적 사례다. 북한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나라다. 역설적이지만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은 ‘미개척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투자 상품’으로 간주된다. 북한 정부는 아시아개발기금(ADB)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자금과 전문가들을 지원받아 경제발전에 투자할 수도 있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경제개발 초기에는 외환시장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산업고도화에 필요한 정책자금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이처럼 북한이 경제 부문에서 국제 무대에 데뷔하려면 비핵화 및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미국 정부가 북한을 직접 지원하지 않아도 괜찮다. 미국이 경제제재 해제와 더불어 국제금융기구의 자금 지원을 막지 않는다면 북한은 상당 규모의 경제개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과 러시아가 2000년대 초부터 추진해온 ‘철의 실크로드’ 구상(북한을 통과하는 철로와 도로, 에너지 망 등으로 동북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거대 프로젝트)이 추진되면 인프라 투자가 북한에 집중되면서 경제발전에 활력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김정은 정권은 급진적 시장 개혁과 체제 안정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 자본을 유치하려면 재산권 보장, 투자자 보호 등 친시장적 제도의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 이는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를 주저한다면, 이 또한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갈등을 격화시켜 국제금융기구의 자금 지원과 외국인 투자를 차단하게 될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세기의 악수를 나눈 뒤 환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은 아니었다. 우리 발목을 잡았던 과거가 있고, 그릇된 관행이 때론 우리 눈과 길을 가리고 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6·12 자리’에서 미래로 몇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발목을 잡았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신중하지만 좀 더 과감하게.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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