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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관계 근육’ 키우기

김소희 (학부모·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6월 19일 화요일 제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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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아이가 한 친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일이 있다. 그 친구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흐르는지 눈가를 가리며 끙 하고 돌아누웠다. 여섯 살 아이의 등짝에서 사연 많은 60대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철렁했다. 나는 그때 ‘돌봄 구력(일명 엄마 구력)’이 한참 딸릴 때였다. 첫아이 키우는 처지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다. 안면만 있던 이웃의 ‘선배 엄마’를 길에서 붙잡고 무작정 물었다. 그이가 해준 말. “‘그랬구나, 그렇구나’ 맞장구 쳐줘라.”

‘그 친구가 그랬구나. 그래서 네 마음이 그렇구나.’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아이에게 큰 지지대가 되는 말이었다.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허둥대던 나에게도 꼭 필요한 충고였다. 대처법을 가르치고 나아가 해결까지 해줘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양육자로서 할 일은 우선,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이 한 친구나 한 관계에만 갇히지 않도록 응원해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이다. 아이가 자기 힘으로 조금씩 이겨내는 과정을. 물론 건강과 안전에 관한 문제라면 보호자의 즉각 개입이 필요하다. 그 밖의 ‘마음고생’은 시간이 약이다. 아이들은 금세 까먹는다!

ⓒ박혜성 그림

초등 저학년 시기는 ‘관계 근육’을 키우는 때이다. 뜻 맞는 친구를 찾아내고 앞장서서 약속도 잡고 놀이방식도 타협한다. 뭘 해도 예쁘다. 친구와 손잡고 교문을 나서는 모습만으로도 기특하다. 초등 고학년 이후는 관계의 폭풍기이다. 친구에 죽고 친구에 산다. 뭘 해도 걱정된다. 친구랑 어깨동무하고 교문을 나서는 것만 봐도 덜컹한다는 부모도 있다.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이 시기의 친교는 취향에 따라 갈리지만 맥락 없이 널뛰기도 한다. 넘쳐나는 호르몬이 농간을 넘어 난동을 벌이는 것일까. 좋아하는 또래 아이의 옆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천하에 재수 없던 아이와 친해지기도 하는, ‘얼뜨기’ 같은 일도 종종 벌어진다.

‘원래 안 그런’ 내 아이도 자라는 중이다

한 이웃의 하소연이다. 중학생 딸에게 오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아쉬울 때에만 딸아이를 이용하고 평소에는 무시하거나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친구를 따라다니며 별의별 수발을 다 드는 것 같아 속이 터진다고 했다. 그 친구와 놀지 말라고 했더니 아이는 눈물 흘리며 ‘내가 좋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걔라도 없으면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따졌단다.

아이고. 아이에게 엄마의 마음을 다 들켰다. 불안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 말이다. 딸은 어쩌면 친구에게서 본인의 ‘효능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얄밉긴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도와주면 고마워하니 뭔가 인정받는 기분 말이다. 그 이웃은 딸아이가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약하다며 종종 피해의식을 내보였다. 늘 아이보다 먼저 아프고 더 울었다. 엄마의 지나친 ‘염려’와 ‘뒤끝’은 아이의 사교 활동과 폭을 제한할밖에. 이런 아이 저런 아이 놀아보며 근력을 키우지 못하고 엄마가 만들어준 관계만 디디고 자라온 후과를 사춘기 들어서 겪는 것 같았다. 친구를 탓하기에 앞서 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먼저 돌아봤으면 좋겠다.

자식을 믿을 일이다. 못 믿는다 해도 들켜서는 안 된다. 믿는 만큼 자란다는 말이 그래서 무섭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웃자라서 연애 타령만 하거나 낄낄대며 PC방 들락거리는 친구들과 유독 어울린다면, 내 아이도 그러고 싶은 거다. 내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닌 게 아니다. ‘잘못 사귄’ 친구도 ‘원래 안 그런’ 내 아이도 자라는 중이다. 안전하게 고여 있느니 위험하더라도 확장되는 게 좋다. 적어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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