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다 큰 성인들이 그렇게 소리 지르는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
“아시안 인베이전! 뉴 비틀스의 탄생이다.”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라스베이거스 빌보드 시상식에 등장한 지난 5월20일(현지 시각), 현지인들이 SNS에 남긴 말이다. 현지 미디어는 이제라도 BTS 열풍에 합류해야 하나 조바심을 냈고, R&B 가수 갤런트와 모델 출신 방송인 타이라 뱅크스 같은 유명인들은 “다양성의 관점으로 볼 때 BTS는 문화 면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이라며 거듭 강력한 지지를 표현했다. 빌보드 공연 이틀 전 발매된 정규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는 5월27일 한국 가수 최초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국내 언론은 케이팝 아이돌이 주류 음악시장에서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좀 더 고무된 모습이다. 기사 제목에 ‘점령’ ‘정복’ 같은 단어가 유독 눈에 띄고 기자회견에서도 빌보드차트 1위 가능성을 집요하게 묻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케이팝의 세계화’라는 국가 주도 한류의 그림자를 다 떨쳐내지 못한 듯 보인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BTS를 둘러싼 지금의 현상은 정말 케이팝이 세계에서 인정받은 결과일까?
케이팝은 일반적으로 한국 가수 전체가 아니라 랩과 보컬,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한국 아이돌 음악을 카테고리화하는 용어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팬덤 문화 역시 케이팝을 정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10대를 위주로 한 팬층, 노래에 따른 집단적 응원 구호, 자신의 가수를 기죽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조공 문화’, 전 세계 그 어느 팬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투표 화력, 홈마·팬캠·출근길 사진·공항 사진으로 대변되는 B컷 문화, 사생팬 등이 그것이다. BTS 역시 이런 케이팝의 토양에서 탄생한 그룹이며, 그로부터 받은 수혜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온 지 이틀밖에 안 된 ‘페이크 러브(Fake Love)’가 빌보드에서 떼창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획사가 노래 발표와 함께 ‘응원법’을 동시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케이팝 가수의 개별적 퍼포먼스는 노래를 방해하지 않는 팬들의 적절한 응원 구호와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BTS 역시 이런 케이팝 루틴을 대부분 수행해왔다. 뭔가 한 끗 다르다 느꼈다면, 그건 그들이 음악적 완성도를 최우선 순위로 둔다는 사실일 것이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멤버들이 거의 전곡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BTS 새 앨범 CD를 스피커로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음악 전문가가 아니어서 기술적 평은 할 수 없지만, 센 음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데도 마냥 귀를 때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풍성한 느낌을 준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보편적인 케이팝 앨범 후반 작업의 수준을 뛰어넘어 레코딩과 믹싱 완성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BTS가 케이팝의 어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들의 팬덤 ‘아미(A.R.M.Y.)’의 양상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국내 포털사이트의 BTS 기사에 달린 댓글은 이미 30~40대가 점령한 지 오래다. 이번 앨범 타이틀곡의 음원 사이트 이용자 통계 역시 20~30대가 10대를 앞서고 있다. 해외 팬덤도 마찬가지다. 한 BTS 해외 팬베이스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즉 20대가 팬 비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트위터의 #BTSisNotYourAverageBoyBand(BTS는 당신이 생각하는 보통의 보이밴드가 아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들어가 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팬들이 BTS의 음악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는지, 어떻게 자신을 구원했는지 절절하게 고백하는 글들로 넘쳐난다. 이번 빌보드를 위해 입국한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팬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에 (BTS를 상징하는) 보라색 리본을 묶고 일렬로 늘어섰다. BTS의 입국 길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의미의 #PurpleRibbonArmy 프로젝트는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마저 “믿기 힘든 일”이라며 감탄하게 만들었다. 우울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는 팬들을 위해 세계 각국 언어로 위로를 전하는 심리 전공자들의 모임(@BTS_AHC), 시리아 등 전 세계에서 고통받는 곳에 꾸준히 아미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단체(@OneinAnArmy)도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BTS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고, 미약하나마 이를 되갚아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이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아이돌 팬이라고 생각했던 집단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말하자면, BTS는 케이팝의 토양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이를 성큼성큼 뛰어넘는 중이다. 우울증과 정신건강, 한국에서 특히 터부시되는 주제를 음악을 통해 서슴없이 말하며 그래도 “넌 혼자 걷지 않는다”라고 말해주는 BTS에 대해 전 세계 팬들이 느끼는 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BTS를 두고 “피곤한 얼굴. 어쩐지 나와 닮은 듯한 그늘. 우리 같이 살아내고 있다고. 천천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가자고 말하는. 목적과 목표만 중요했던 날들의 끝과 함께 찾아온 우리의 아이콘”이라고 말하는 어느 팬의 말은 그들에게 받는 위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니 달콤하고 화려한 포장으로 일시적 탈출구를 제공해주던 케이팝을 벗어나 밀레니얼 세대의 맨얼굴이자 롤모델로 받아들여지는 BTS를 두고 ‘포스트 케이팝’이라 부르는 것은 결코 과한 시도가 아니다.
케이팝에서 태어났으나 개별적인 예술적 기교(artistry)와 영향력으로 자신들만의 독보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BTS. 바라는 게 있다면, 국내 언론이 마치 올림픽 금메달 중계하듯 이들의 차트 성과만 조명하지 말고, ‘밀레니얼 세대의 맨 얼굴’로서 이들이 갖는 동시대적 의미에 대해 좀 더 준비된 비평으로 접근해주길 바란다. 또한 아티스트로서 이들이 갖는 잠재력이 충분한 여유를 갖고 펼쳐질 수 있도록 이제 케이팝 산업계의 소모적 루틴도 조금은 변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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