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했던 북한 관련 도서 세 권은 김일성주의의 종언과 돌이킬 수 없게 된 북한의 시장경제화를 한입으로 말하고 있다. 박영자의 〈북한 녀자-탄생과 굴절의 70년사〉(앨피, 2017) 역시 앞서 읽은 책의 저자들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1990년대 이래 국가가 국민들의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는 20년 이상의 역사를 경유하며, 현재 북한 사회는 아래로부터 통치 질서가 서서히 해체되고 시장화와 함께 변화하는 주체들이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북한 정치를 15년 동안 연구해온 지은이는 이 책에서 분단 70년간 북한에서 구축된 젠더 시스템을 분석한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해방과 여성 해방을 함께 약속했지만 유교적 가부장 의식과 민족주의, 전시 공산주의(혹은 전체주의적인 군사 문화)가 합체된 북한 사회에서의 여성 지위는 어느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열악했다. 유교적 가부장 의식 아래서 여성은 ‘돌봄’ 노동의 담당자가 되었고, 민족주의의 핵심 과제는 여성이 주체가 되는 것을 막았다. 또 전시 공산주의는 여성을 남성 중심주의의 주변으로 밀쳐냈다.
김정은 정권은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 여성권리보장법을 채택 발표했고, 2012년에 ‘어머니의 날’을 제정했다. 두 가지 시혜는 1990년대 중반의 식량 위기를 극복한 여성들에 대한 보상이면서, 식량 위기로 인해 벌어진 가정 파괴에 대한 방지턱이다. 북한 정권으로서 “가족해체는 권력을 지탱해온 ‘세포’”를 잃는다는 점에서 그냥 볼 수 없었던 데다가, “북한 경제의 핵심 역할을 하는 활동력 높은 여성들을 정권 내로 다시 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사실은 자율적인 시장(장마당)이 중시되면서 높아진 여성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북한 정권의 공식적인 젠더 구조는 변한 것이 없다. 지은이는 향후 북한 정권의 젠더 시스템은 시장화로 목소리가 커진 여성과 무기력한 남성 사이의 대결에 의해 깨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박태상의 〈북한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의식과 성 역할-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비교 고찰〉(한국문화사, 2018)은 김정은 시대에 발표된 북한 소설에서 북한 여성의 위상 변화를 본다. 2013년에 발표된 한정아의 장편소설 〈녀학자의 고백〉은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한 동창생 리현심과 송리옥이 주인공이고, 석남진이 같은 해에 발표한 단편소설 〈어머니의 품속에서〉는 국방과학연구원 엄정화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면서 과학자다. 재료금속공학자인 리현심은 새로운 전기접점 재료를 연구하고 있고, 엄정화는 광명성 3호 발사에 참여했다. 여성 과학자의 잇단 등장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대학에서 열공학(熱工學)을 전공하고 새로운 대체연료 개발에 사력을 다했던 이 소설의 주인공 리진호는 남자였다.
“먹는 데 아낀다”는 응답이 많은 이유
지은이는 1980년대 들어 북한 소설이 유난히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로 “1970년대 이후 남한과의 군비경쟁 그리고 산업 근대화 경쟁” 등을 꼽으며, 아울러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기술적 원조를 받기 어려워진 현실”을 든다. 여기에 여성 과학자가 가세하게 된 것은 노동력 부족과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여성 고급 인력이 양성되어야 할 절실성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이 따라하려고 하는 지식경제 기반 사회는 남성 중심의 근육노동보다는 여성의 섬세한 감성이 더 필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악은 한 번도 정치와 유리된 적이 없었다. 전영선·한승호의 〈NK POP: 북한의 전자음악과 대중음악〉(글누림, 2018)은 중요한 국내외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북한 정권이 어떤 식으로 ‘음악정치’를 펴왔는지 탐구한다. 2012년 7월11일과 12일 저녁 8시15분, 조선중앙TV를 통해 모란봉악단의 시범 공연 녹화 실황이 방영되었을 때 평양거리가 한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등극한 지 1년도 채 안 된 이때는 유교적 가치를 간직해온 북한 처지에서는 아직 국상(國喪)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란봉악단은 북한 최초로 미국 영화 〈록키〉와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미녀와 야수〉 〈백설공주〉 등의 주제곡을 노래하거나 연주했는데, 이런 파격은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와는 다른 정책을 도모할 것이라는 신호로 비쳤다.
중요 단원 거의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23~25명 규모의 모란봉악단은 북한에서 한국의 ‘걸그룹’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북한 당국은 ‘변혁’을 앞세운 김정은 시대의 체제 선전운동으로 모란봉악단을 띄워 올린다. 모란봉악단은 경제 발전에 오랫동안 동원된 북한 주민들의 누적된 피로감을 해소하고, 김정은 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밝고 희망적으로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더해 이미 유입된 자본주의 문화를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 상황과 북한 주민들의 높아진 문화 수준에 부응하기 위해 이들을 활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 지역으로 갈수록 주민들의 평균 키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2월14일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통해 넘어온 21세 북한군 병사의 키는 154㎝, 체중은 47㎏에 불과했다. 2010년 한국기술표준원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은 174㎝이고 체중은 69㎏이다. 북한 청년의 이와 같은 신체 왜소화를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식량 생산과 배급 실패에서 찾기 일쑤지만, 김영희의 〈푸코와 북한 사회 신체왜소의 정치경제학〉(인간사랑, 2013)은 색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북한 사회의 신체 왜소가 푸코가 말한 권력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국가의 규율 권력이 체계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에 각인된 결과 북한 주민의 집단적인 신체 왜소화가 일찌감치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 당국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민들에게 ‘저소비 의식’을 교육했고, 197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강요된 저소비 의식은 주민들에게 식품 부족 환경에 견딜 수 있는 적응력을 키워주었다. 신체 왜소는 절약을 강제하고 낭비를 금하는 국가의 훈육에 길들여진 결과이자 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주민들의 자기 보존책이었다. 북한 당국의 세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먹는 데 아낀다”,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도 돈 쓰기가 망설여진다”라는 응답이 많은 것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푸코와 북한 사회 신체왜소의 정치경제학〉은 한국에 전혀 인맥이 없는 탈북자 출신 학자가 쓴 것이어서인지, 소리 소문 없이 나와서 그야말로 한 편의 리뷰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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