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5월16일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최다 추천 청원 제목이다. 5월11일 시작된 청원은 닷새 만에 35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발단은 홍익대학교 누드 크로키 수업에서 발생한 남성 모델에 대한 불법 촬영(몰래카메라) 사건이었다. 여성인 범인은 사건 발생 1주일여 만에 검거됐고, 조사 결과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어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여론이 들끓었다. 피해자가 남성이라 신속히 처리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였다.
경찰의 발 빠른 대응은 피해자가 남성이어서라기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다 보니 ‘특별하게’ 취급됐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경찰의 수사력은 ‘때마침’ 제대로 발휘됐고, 범인은 신속하게 검거됐다. 그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수사기관으로서도 칭찬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자신들의 예상과 다른 문제 제기에 당황스럽고 억울할 수도 있다. ‘이게 성차별이라고?’ 의아할 수도 있다.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 역시 5월14일 기자간담회에서 “성별에 따라 수사 속도를 늦추거나 빨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처리 속도와 결과에 여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불법 촬영 범죄의 피해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여성인 유사 사건에 대해 한국의 법조계는 어떻게 대응해왔을까. 불법 촬영에 대한 피해와 상처가 심각함에도 기소와 처벌은 그에 상응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검찰청 2017 범죄 분석’에 따르면 2016년 카메라 등을 이용해 촬영한 범죄로 검거된 사람 5249건 중 기소된 사건은 1716건, 이 가운데 구속된 사건은 154건에 불과했다. 국민청원은 그 불만이 누적돼 나타난 반응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같은 ‘관행’은 심각한 문제다. 수사 지휘를 하는 검찰은 불법 촬영에 대해 철저한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다. 법원도 위중하게 처벌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경찰이 검찰과 법원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란 쉽지 않다. 결과는 물론이고 이 과정 자체가 피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이자 불만일 수밖에 없다.
법 적용의 복판에 사람이 있다
얼마 전 피해자 고소 대리를 맡았던 준강간 사건이 있다. 가해자는 준강간이 아니라면서 성관계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합의하에 한 성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당시 만취 상태로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준강간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자기도 모르는 불법 촬영 영상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불법 촬영 영상이 법원에 제출된 게 전부인지, 혹은 이미 다른 곳에 암암리에 유포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렵다고 했다.
나는 변호인으로서 검찰에 불법 촬영에 대한 압수수색을 요청했다. 검찰 반응은 당황스러웠다. 비록 몰래 찍은 영상이지만 영상물의 소유권이 가해자에게 있기 때문에 압수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대신 경찰이 불법 촬영에 대해 기소 의견 송치를 했지만, 그 영상이 범죄인지에 대한 판단이 나기까지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가해자가 불법 촬영 영상을 자발적으로 제출했고, 이를 유포하다 적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을 검토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영상이 유포됐을 시 피해자가 당할 피해는 중요하게 감안되는 것 같지 않았다.
변호사이기에 앞서 한국 사회를 사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이런 사건 앞에 서면 말 그대로 속이 터진다. 관련 법규 재정비도 중요하지만 역시나 중요한 건 이미 있는 법과 수사력을 ‘이번 사건처럼’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범죄도 사람이 저지르지만 단죄도 사람이 한다. 법 적용의 복판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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