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사진이 되어버린 중학교 졸업 사진을 김길자씨(79)는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흑백 증명사진 속 주인공은 문재학군(당시 16세). 2남1녀 중 막내였던 그는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이었다. 문군은 ‘여자와 고등학생은 빠져나가라’는 시민군 대책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27일 도청에 끝까지 남았다.
부모는 그해 5월25일 막내를 만나 도청에서 나오라고 설득했다. “엄마, 내 국민학교 동창 양창근 알제? 걔가 죽었어. 나라도 지켜야제.” 막내는 울면서 말했다. 부모는 재학군의 손을 놓아주었다. 5월27일 계엄군이 재진입했고 부모는 당시 시신도 찾지 못했다. ‘교련복을 입은 학생이 숨져 망월동 인근에 매장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해 6월 초 가매장된 곳의 흙을 파헤쳐 막내를 찾았다. 나중에 외신기자가 찍은 마지막 날 전남도청 사진에서 교련복을 입은 재학군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식을 위해선 못할 것이 없데. 무서운 거 하나도 없어. 우리가 나가믄 경찰이 막 따라다녀. 그라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진상을 알리겠다고 막 우리가 악을 쓰고, 전두환이 때려죽인다고 우리 아들 죽인 살인마라고 그라고 악을 쓰고 다녔제.”
어머니 김길자씨는 그렇게 투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아버지 문건양씨(83)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노부부는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음악치료를 받으며 아들을 잃은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38년이 지났지만 이들에게 5월 광주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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