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협’은 단지 남한과 북한만의 경제 협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극동 지역, 몽골, 일본 등이 밀접하게 얽히는 ‘동북아시아 경제권’으로 가는 관문으로 보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저개발 지역인 한반도 북부 및 그 북방 지역에 새로운 수송로와 산업 중심지, 노동자와 소비자 집단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된다. 경제대국인 한국과 일본은 그로부터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 중심에 북한 최북단의 중국·러시아 접경 도시인 나선시가 있다. 나선시를 통한 새로운 물류(물자의 흐름)의 가능성은 이미 입증되었다. 시베리아 서부의 석탄이 나선시의 나진항을 통해 한국의 포항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송된 바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나진항 3호 부두의 50년 운영권은 러시아가 갖고 있다.

첫 시범 수송은 2014년 12월에 시행되었다. 시베리아 서부에서 채굴된 석탄 4만5000t이 ‘시베리아횡단철도(TSR:모스크바-시베리아-블라디보스토크-하산을 잇는 총길이 9288㎞의 세계 최장 철도)’를 타고 극동 러시아의 종착지 하산역에 도착했다. 하산역과 북한 최북단의 기차역인 두만강역 사이엔 54㎞ 길이의 철로가 이미 개설되어 있었다. 석탄은 두만강역에서 2㎞ 떨어진 나진항 3호 부두까지 철로로 도착했다. 나진항에 대기하고 있던 현대상선의 벌크선은 석탄을 싣고 동해를 남하해 포항으로 들어갔다. 이 석탄은 포스코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2015년 4월과 11월에도 각각 14만t과 12만t의 석탄이 같은 경로로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의 생수가 나진항을 통해 부산으로 입성하기도 했다.

나진항을 이용할 수 없었다면, 시베리아의 석탄은 러시아 연해주의 항구를 통해 한국으로 수입되었을 것이다. 당시 통일부는 나진-하산 물류망을 통해 러시아 석탄 수입 관련 비용이 10~15% 감소하리라고 추정했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2017년 현재 한국이 가장 많은 석탄을 수입하는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러시아 순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는 각각 한국에서 8000㎞, 5000㎞ 이상 떨어져 있다. 북한 나선시의 나진항은 수출국인 러시아에나 수입국인 한국에나 경제적 의미가 컸다.

나선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러시아를 마주 보는 북한의 경제특구다. 오른쪽으로는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나선시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은 고대로부터 지리·경제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국제적 요충지였다.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 성), 몽골, 러시아 연해주 및 시베리아 등을 포괄하는 광활한 유라시아 동북부 지역의 사람과 물자가 동해로 나가려면 반드시 나선을 거쳐야 했다. 일단 동해로 진입하면 가깝게는 한반도 남부와 일본, 멀게는 중국 남부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나선에서 해안선을 타고 북쪽으로 수십 ㎞만 올라가도 겨울에 바다가 얼어붙는다. 러시아 동부에는 부동항이 없다. 한반도 서쪽 너머의 랴오닝 반도를 통해 서해로 진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멀고 험한 육로를 거쳐야 한다. 고대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 남부 및 일본은 주로 나선을 통해 왕래했다. 나진항은, 나선시의 여러 항만 중 가장 각광받는 지형이다. 만의 굴곡이 뚜렷한 데다 수면도 비교적 잔잔한 천혜의 항구다. 2010년대 들어 변경 지역(중국은 동북 3성, 러시아는 연해주) 개발을 본격화한 중국과 러시아가 나선시에 집착해온 이유다.

두 대국은 자국 개발 지역의 거점 도시들을 잇는 철로와 도로 등 경제 인프라를 의욕적으로 건설해왔지만 근본적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거점 도시에서 생산된 물자를 해로를 통해 외부 세계로 내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항구들은 겨울철에 앞바다가 얼어붙는다. 중국 동북 3성에서 동해로 이르는 길은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막혀 있다. 한반도 서해로 나가는 육로도 있지만 너무 길다. 동북 3성의 중심 도시인 훈춘에서 랴오닝성 다롄항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800㎞다. 나진항까지는 겨우 70㎞.

몽골횡단철도(TMGR), 중국횡단철도(TCR)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연결돼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나선 지역에 대한 접근도를 높이기 위해 경쟁해왔다. 러시아가 하산역에서 북한 나선시 두만강역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개통한 것은 2013년이다. 이와 함께 나진항 3호 부두에 대한 50년 운영권을 획득했다. 중국은 북한의 나선특구 개발에 참여했다. 2008년에는 나진항 1호 부두의 10년 운영권을 얻었다. 북한 원정리에서 나선에 이르는 50㎞ 길이의 4차선 도로를 깐 것도 중국이다. 원정리의 두만강 건너편은 동북 3성의 거점 도시 중 하나인 훈춘이다. 함경북도 남양면과 나선을 잇는 150㎞ 거리의 철로도 계획되어 있다. 남양면에서 두만강 위로 놓인 철교를 건너면 만주횡단철도(TMR)의 기점인 투먼이다. 만주횡단철도는 몽골횡단철도(TMGR)나 중국횡단철도(TCR)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결국 시베리아횡단철도로 합류하게 된다.

‘한반도 신경제지도’에 등장하는 ‘나선’

모든 길은 나선으로 통한다. 나선의 한쪽 날개는 유라시아 중부 및 동북부의 상대적 저개발 지역이다. 다른 쪽 날개는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다. 양측의 자본, 물자, 에너지와 인력이 서로 오갈 수 있는 거대하고 긴 통로의 입출구가 바로 나선이다.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책자와 이동식 저장장치(USB)에 담아 전달한 ‘남북 경협 구상’에는 남북 간 육로(철도와 도로) 연결 방안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문점 선언에도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한다(1조 6항)’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발표한 ‘한반도 신경제지도’에 따르면, 부산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철로의 종착역이 바로 나선이다. 서해안 쪽에서는 경의선을 평양과 신의주로 이어 중국횡단철도와 연결한다. 이 같은 동서의 물류망을 비무장지대의 친환경적 개발로 연결하면 ‘한반도 H-라인’이 완성된다.

한국은 경제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투자할 곳이 없다. 투자가 없으니 인력 수요도 없다. 남북 경협은 ‘동북아시아 경제권’ 형성을 위해 메워야 할 ‘빈 공간(북한)’을 채우는 역사(役事)다. 상대적 저개발 지역인 한반도 북부는 물론 그 북방의 중국·러시아 변경 지역이 새로운 초고성장 지대로 떠오르면서, 한국 경제의 활동 공간을 확장해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저개발 지역 내부, 그리고 저개발 지역과 한국·일본을 교통 및 에너지 인프라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자연적이거나 정치적 이유로 고립되어 있던 북한과 중국 동북 3성, 몽골,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가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릴 것이다. 자본과 상품과 노동의 새로운 길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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