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과 비리 의혹이 매일같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항공 직원들의 제보를 통해서다. 진원지는 익명의 카카오톡 채팅방(단톡방). 한 대한항공 직원이 개설한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사과문과 대책을 발표한 4월22일 이후에도 구체적인 제보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개설 첫날 200명에 그쳤던 참가 인원은 1800명을 넘어섰다.

직원들이 직접 나서는 데는 노동조합이 조양호 일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탓이 크다. 대한항공에는 노동조합이 3개 있다. 대한항공 직원 1만9000명 가운데 약 1만1000명이 소속된 한국노총 산하 ‘대한항공 노동조합’의 경우, 위원장을 간선제로 뽑는 데다 임금협상까지 회사 측에 위임하는 등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난이 내부에서 많이 제기된다. 민주노총 소속의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조합원 약 1100명)’, 독립 노조인 ‘대한항공 조종사 새 노동조합(조합원 약 600명)’은 조종사만 조직 대상으로 삼는데, 역시 회장 일가 견제에는 소극적이라는 평가다. 3개 노조는 남북 정상회담 당일인 4월27일 점심시간에 ‘오너 갑질 재발방지 서면약속’을 요구하는 회사 앞 집회를 계획했다가 단톡방에서 ‘참여 거부’ 릴레이 역풍을 맞았다. 이슈가 되기 어려운 시점에다 회장 일가 퇴진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종사 새 노조는 집회 불참을 선언했고, 두 개 노조는 ‘회장 일가 퇴진’으로 요구 사항을 바꿔야 했다. 직원들은 단톡방에서 기존 노조가 배제된 촛불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한 대한항공 직원은 “4년 전 (땅콩 회항 당시) 회장 일가족이 호되게 당한 뒤에도 이런 일이 반복된 탓이다. 회장 일가가 내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놓았으니 하나하나가 등 뒤에서 칼이 되어 날아오는 형국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사IN 신선영4월25일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이 서울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갑질 청산’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근 조양호 회장은 두 딸을 한진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사퇴시키고 대한항공에 ‘전문경영인 부회장직’을 신설해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를 앉히겠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손사래를 치는 직원들이 많다. 회장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다. 한 승무원은 “‘갑질’ 문제의 근본 원인은 조양호 회장 자신이다. 자신의 ‘오른팔’ 격인 석태수씨를 카드로 꺼낸 순간 진정성이 사라졌다. 조원태 사장 역시 인성 논란이 있던 데다 경영 능력도 검증된 바 없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대한항공에 아무 공식 직함이 없는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차치하더라도)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을 경영에서 물러나게 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조 회장이 대한항공에 직접 보유한 지분은 0.0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 회장은 대한항공의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대주주다. 조 회장(17.84%)과 특수 관계인들이 한진칼의 주식 가운데 28.96%를 보유하고 있다. 한진칼 사외이사 3명과 대한항공 사외이사 5명 가운데 대다수는 조 회장과 개인적 인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국내 소형 법무법인 제이앤파트너스 법률사무소는 “(지난해 말 기준 56.40% 지분을 보유한) 소액주주들의 힘으로 대한항공 경영진을 교체하자”라고 제안하고 주주들을 모으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의 2대 주주(11.67%, 지난해 말 기준)인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지분율이면 주주 제안을 통해 이사 해임 안건을 제안할 수 있고, 주주총회를 소집해 조원태 사장 해임을 결의할 수도 있다. 해임이 부결되면 법원에 이사 해임을 청구하는 방법도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국민연금 역할론’은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튜어드십 코드(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지침)’ 활성화를 공약한 바 있다. 정부는 올 하반기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방침이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데 대한 ‘연금 사회주의’ 우려도 있다.

SK텔레콤에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이사회 결원으로 본다’는 정관 조항이 있다. 기업 간부에서 범죄자를 제외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대한항공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에는 그런 제동장치가 없다. 김남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법무법인 위민)은 “지금 같은 체계에서는 여론에 의해 잠시 뒤로 물러난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문제를 일으킨 총수 일가가 경영에 복귀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나 소액주주들이 이사회를 통해 총수 일가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물컵 갑질’로 촉발된 대한항공 사태는 재벌 개혁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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