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자크 랑시에르 지음, 길 펴냄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제목이 그렇다. ‘정치’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자리’는 또 무언가? 올해부터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대표작’을 손에 들고 가장 먼저 던질 법한 질문이다. 초판이 아닌 수정증보판을 옮겼기 때문에 국역본에는 한국어판 서문까지 포함해서 저자의 서문만 세 편이 실려 있다. “한국의 독자들 손에 도달함으로써, 이 책은 1986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시작한 시공간 속의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국어판 서문은 예외적일 만큼 긴 분량이며 그 자체로 자세한 해제를 겸한다. 거기에 ‘옮긴이의 덧말’까지 말 그대로 덧붙어 있으니 독자로서는 예상치 못한 호사다.

미테랑, 현자의 ‘권위’로 시라크 압도

‘정치의 종언’을 주제로 한 첫 장에서 랑시에르가 검토하는 것은 1988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과 총리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이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미테랑은 공약을 110개 내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선에 임하면서 그는 공약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반(反)공약’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압도하며 여유 있게 재선에 성공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젊은 총리’ 시라크가 ‘늙은 대통령’ 미테랑을 겨냥해 내세운 건 약속과 역량, 말과 현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하는 인간’과 ‘언제나 진보하는 역동적 인간’이라는 이분법이었다. 그러한 이분법이 ‘미테랑이냐 시라크냐’ 하는 양자택일 구도라고 선전한 것이다. 반면에 미테랑이 유일하게 내세운 건, 예외적인 공약 단 하나였다. 만약 그러한 이분법에 빠지게 된다면 프랑스에서는 내분과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최악의 약속’, 그것 하나였다. 그는 약속 대신에 현자의 ‘권위(potestas)’를 내세운 것이고, 그로써 시라크의 ‘역량(potentia)’을 압도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곧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서 철학자답게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같은 그리스 철학 경전을 재검토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장에서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까지 도출해낸다. 하지만 그러한 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정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따라가는 건 손쉽지 않다. 문장들이 내내 머리의 가장자리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소개되는 책이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기자명 이현우 (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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