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기적으로 ‘시 처방전’을 쓰고 있다. 독자들의 사연을 받아 읽고 그에 맞는 짧은 글을 적은 뒤 시 한 편을 추천해주는데, 호응이 좋아서 최근에는 200여 개가 훌쩍 넘는 사연을 받아 읽었다. 온라인 신청 페이지를 굳이 열어 글을 적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보니, 사연들도 각자의 생활 속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감정의 요동에 관한 진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은근 사연의 맛이 있어서 혼자 실실 웃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며 마음 한쪽을 쓸어내렸다. 좋아하던 가수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의 사연이나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시작한 이의 사연, 오래 키운 고양이와의 이별을 준비하려는 이의 사연을 앞에 두면 나부터가 감정의 산물이 되었다. 어떤 이의 사연이 언젠가의 내 사연이다.
그러나 그런 사연들 중에는 뭐라 말을 전할 수 없고, 감히 처방을 내려줄 수 없는 사연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해서 폭력에 노출되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사연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하여 고통을 온몸으로 떠안고 있다는 사연, 마음의 우울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어 자주 죽음의 유혹에 빠진다는 사연을 보노라면 몸이, 마음이, 말이, 글이 굳었다. 슬픔의 범위를 떠올리기가 겁났다. 슬픔은 깊이를 재는 일이 아니라 넓이를 재는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슬픔은 슬픔 그 자체로서 똑같은 깊이를 갖기 때문이다. 깊어서 더 슬프고 얕아서 덜 슬픈 슬픔은 없다. 슬픔은 슬픔이다. 우리는 다만 슬픔의 범위를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슬픔의 범위를 짐작하는 일은 오랜 삶의 내공이 있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섣부르게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슬픔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타인의 슬픔에 관해선 아직 앎이 짧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연들 주변에서 마음의 발길을 쉬이 돌리지 못해 서성였다. 누군가의 사연에 관련된 타인의 도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세월호 생존 학생 모임인 ‘메모리아’의 글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월호 탈출기라고 해야 할 어떤 이들의 ‘생존담’에는 죽은 자의 침묵에 버금가는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음이 꽝, 했다.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길이, 손길이 거기 머물렀다.
‘메모리아’의 글을 읽고 떠올린 한 시인의 말
생존이라는 말이 아니라 행위에 관하여 생각해보았다. 생존은 축복인가, 고통인가. 생존은 살아남은 것인가, 살고 있는 것인가. 생존은 죽음의 반대말인가, 비슷한 말인가. 우리는 늘 죽음을 죽음이라는 이유로 애도하고 생존을 생존이라는 이유로 세심히 대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생존자가 지닌 슬픔의 범위를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생존자를 향한 우리의 잣대는 늘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되돌아보았다. 메모리아는 세월호의 기억과 진상 규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임이다, 라는 말을 보며 최근 읽은 한 시인의 글을 떠올렸다. 시인은 위로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때 그 찾아 나섬은 슬픔을 사이에 둔 나와 너의 거리를 어디까지 짐작해본 이후의 일일까.
최근에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낸 한 선배가 아버지가 병상에서 적은 손글씨를 휴대전화로 찍어 보여주었다. 나는 “이 자식아 보고 싶어 죽겠다 이제 아빠는 희망이 없다”라고 적힌 종이를(사진을) 바라보다가 선배에게 뒤늦은 ‘처방전’을 건네고 싶어졌다. 찾아 나서기 전에 찾아오는 위로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 또한 삶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슬픔을 짐작하는 일이란, 할 수 있는 일과 방향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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