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면 으레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먹거리만 지역 특산품으로 팔리는 줄 알았다. 오키나와에서는 고작 ‘흑당(黑糖)’이라 불리는 검은색 설탕이 특산품이다. 인도에서는 ‘재거리(Jaggery)’, 중국에서는 ‘추탕(粗糖)’이라 불리는, 정제하기 전 설탕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식재료를 굳이 특산품이라고 팔고 있었다.
다른 특산품도 후줄근한 구석을 감출 수 없었다. 류큐 왕가에서 먹을 정도로 귀했다는 과자 ‘친스코’는 밀가루와 설탕으로 이루어진 빈곤한 맛의 쿠키에 가까웠고, ‘사타안다기’는 시럽이나 크림이 발리지 않은 생도넛 같았다. 먹을 만한 변변한 전통 과자조차 없는 곳, 오키나와는 이상한 일본이었다.
인도 혹은 인도네시아가 원산지라고 추측되는 사탕수수는 중세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희귀한 식재료였다. 흑당을 처음 본 서양인은 알렉산더를 따라 동방 원정을 온 군인들이었는데, 벌이 아닌 나무에서 꿀을 추출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신대륙 발견과 함께 사탕수수 재배가 대규모 플랜테이션과 노예무역으로 발달한 건 많이 아는 상식. 하지만 그런 플랜테이션이 아시아, 그것도 오키나와까지 확장됐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키나와는 일찌감치 사탕수수가 전래되었지만, 사탕수수를 통해 흑당을 만드는 방법이 알려진 건 17세기였다. 공교롭게도 규슈 사쓰마 번이 오키나와를 침략해 지배하기 시작한 때와 거의 일치한다. 힘없는 자가 값비싼 물건을 가지면 쉬이 약탈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흑당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 남부 지역뿐이었는데, 이 방법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오키나와에는 일본식 플랜테이션이 만들어진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구대륙에서 전파된 각종 질병으로 원주민이 사라지며 흑인 노예가 필요했지만, 오키나와는 이전부터 왕래가 있던 지역이고 인구도 급감하지 않았다. 일본 본토의 식민지가 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벼농사와 맞먹을 정도로 노동집약적이다. 노예화한 주민들은 사탕수수 외 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다. 심지어 쌀조차 사쓰마 번을 통해 구입해야 했다. 만약 구황작물인 자색 고구마가 중국에서 오키나와로 전파되지 않았다면 현재 오키나와 원주민 수는 훨씬 줄었을지도 모른다.
오키나와의 희생으로 오늘날 ‘일본 맛’ 완성
사탕수수를 재배해 거둔 설탕은 일본 본토로 확산됐다. 이전까지 짠맛 위주였던 일본 요리는 오키나와의 ‘희생’으로 단맛을 추가했고, 오늘날 일본 맛의 원형을 완성했다. 일본에 미식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오키나와는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했다. 일본이 튀김요리를 만들 때, 모든 걸 수탈당한 오키나와는 제한된 식재료를 찌거나 삶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배경을 모르고 오키나와를 방문한 이들은 왜 일본 본토에 비해 음식 맛이 떨어지느냐며 타박을 늘어놓기 일쑤다.
현재 오키나와 농민 가운데 사탕수수 재배 농민은 70%에 달한다. 농토도 50%를 점유하고 있지만, 농업 산출액은 20%에 불과하다. 사쓰마 번 시대에 만들어놓은 수탈 구조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오키나와를 갈 때마다 습관처럼 흑당을 구입한다. 입은 달지만, 한숨이 나온다. 오키나와의 농토를 가득 메운 사탕수수 밭에는 비극의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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