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주년을 맞은 올해 똑같은 나이테를 가진 비극의 상처가 육지에도 있다. 제주에서 북촌리 주민 집단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1949년 경북 문경 산북면 석달동에서도 군부대가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그해 12월24일, 중무장한 군부대가 들이닥쳐 남녀노소 마을 주민 86명을 아무 이유도 없이 무차별 학살했다. 당시 희생자 86명 중 42명이 여성이었으며 22명은 열 살 이하의 어린이였다. 5명은 한 살배기 갓난아기였다. 참혹한 현장에서 일가족 아홉 명을 잃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생존자가 당시 열한 살 난 소년 채의진이었다. 나는 1989년 가을 그를 취재원으로 처음 만나 27년간 인연을 이어왔다.

ⓒ시사IN 양한모
채의진 선생은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그 고통을 딛고 나와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거리에서 살며 헌신했다.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암울한 역사를 증언한 시대의 증언자이자 목격자인 그는 끈질긴 투쟁으로 미흡하나마 국가의 사과를 이끌어냈다. 나는 그 과정을 기사로 기록했다.

그런 인연과 연대 활동의 결과 채 선생과 나는 2016년 진실의힘 인권재단이 수여하는 제6회 인권상을 공동수상했다. 그와 함께 내가 시상대에 선 것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금기시됐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활동을 과분하게 평가해준 덕분이었다. 안타깝게도 채 선생은 시상식 후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채 선생의 영전에서 나는 그의 헌신과 투쟁 기록을 평전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최근 그의 70년에 걸친 진상 규명 투쟁 과정을 기록한 단행본 〈빨간 베레모〉를 펴냈다.

경북 문경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는 수많은 ‘4·3’이 존재한다. 과거 진실화해위원회가 설치돼 활동했지만, 조사 활동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야 했다. 진실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 묻혀 있고, 가해자와 책임자가 누군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문경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오늘도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통한 비극의 완전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상생과 화해의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가 그 첫 단추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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