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서면을 쓰려고 출근한 일요일이었다.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주말에는 사무실로 전화가 와도 잘 받지 않는데, 딴생각을 하다가 얼떨결에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눌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상한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결혼 이주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남편과는 몇 년 전 이혼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었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으며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계속 성추행을 했고 최근 경찰에 신고한 상태라고 했다. 여러 정황상 사정이 딱해 다음 날 바로 만났다. 피해자는 매우 불안해했다. ‘당한 일’은 많지만 직접적인 피해 증거를 수집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추가 피해가 있었지만 신고한 사건 외에는 추가로 신고하거나 진술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실직했다.

실직 뒤에도 사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술을 마신 채 전화를 해왔다. ‘누가 네 말을 믿어줄 것 같으냐.’ ‘빌린 돈 100만원을 갚아라.’ 빌린 적도 없는 돈을 갚으라며, 돈을 갚기 싫어서 신고한 것이라고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는 신고를 했지만 경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사장한테 해코지당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 긴장해서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 처음에는 피해자가 왜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고 긴장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건을 맡아 진행하는 동안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켈 그림

한국어로 일상생활이 가능한, ‘적당히 말이 통하는’ 결혼 이주 여성이라는 점이 수사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했다. 수사기관에서는 통역을 별도로 붙이지 않았다. 일부러 내가 통역사를 데리고 갔다. 경찰은 통역사를 오히려 번거로워했다. 조사하던 수사관이 질문을 하며 목소리가 커지곤 했다. 피해자는 그럴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 사장에게 오랫동안 당한 성추행 악몽이 떠오른 탓이다. 경찰에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전화를 할 수 없도록 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사관은 말은 전하겠지만, 그 이상의 별도 조치는 어렵다고 답했다.

법은 약자의 마지막 보루이지만 약자의 처지에서 운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자료라며 제출한 사진이 피해자에게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피해자는 열람·복사를 신청할 수 있는데 검사가 허가하지 않으면 사진을 볼 수조차 없다. 피해자가 찍혀 있다 하더라도, 사진 파일은 찍은 당사자인 가해자의 것으로 분류된다. 가해자가 사진을 배포하면 다른 범죄행위가 되더라도 당장 피해자가 그 사진을 영구적으로 삭제시킬 방법도 없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잡으며

신고와 최초 진술을 혼자 마쳤던 피해자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통역사를 입회시켜 신고하지 못했던 피해에 대해 추가 고소를 했다. 조사 중 잠깐 쉬는 시간에 피해 여성의 손을 꽉 잡았다. 경찰서 앞에서 만났을 때 바들바들 떨던 얼음장처럼 찬 손에 온기가 돌았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하다가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통역사가 전해준 말에 따르면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었던 날, 15층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안 믿어주면 어떡하나, 도리어 거짓말을 했다고 몰리면 어떡하나…. 막막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내가 그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일요일 그 전화는 애환 많은 피해자의 간절함이 만든 인연이었다. 내가 맡은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갈 길이 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다. “아직도 이런 한국이라 미안해요.” 그녀의 손을 잡고 힘겹고 먼 길을 가보려 한다.

기자명 이은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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