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할을 정직한 중재자로 본다.” 미국 워싱턴 외교가에서 오랜 세월 대북 강경파로 악명 높았던 존 볼턴 전 유엔 대사가 3월22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직후 〈폭스뉴스〉에서 한 말이다. 4월9일 국가안보보좌관에 공식 취임하는 볼턴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듯 트럼프 대통령이 즐겨 본다는 〈폭스뉴스〉에 출연해 스스로를 ‘정직한 중재자’로 표현한 것이다.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Axios)〉는 볼턴의 의중에 정통한 인사들 말을 인용해 “적어도 볼턴이 임기 초반엔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을 제어하고 정직한 중재자로서 이미지를 쌓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그런데도 볼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워싱턴 외교가에는 과거 전력상 그가 ‘정직한 중재자’로 행세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구축한 뒤 자신의 어젠다를 최대한 밀어붙일 심산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원래 국가안보보좌관의 고유 임무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유관 부처의 견해를 대통령이 고루 듣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조정자 구실이다.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다는 특성 때문에 종종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인 1953년 로버트 커틀러 이후 가장 최근인 허버트 맥매스터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가안보보좌관 26명 가운데 ‘정직한 중재자’ 노릇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받는 이는 한 명뿐이다. 바로 조지 H. 부시 행정부 때인 1989년부터 4년간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정도다.
‘정직한 중재자’를 자임한 볼턴은 스코크로프트의 뒤를 밟을 수 있을까?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대다수 외교 전문가들의 평가는 정반대다. 괄괄한 성격에 무자비한 관료적 승부 기질, 극단적 보수관으로 무장한 그의 됨됨이를 감안할 때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볼턴은 공화당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부 군축안보담당 차관과 유엔 대사를 지내면서 ‘미국의 힘을 통한 국제문제 해결’을 주창해온 ‘네오콘(신보수주의)’의 기수다. 이란에 대해서는 정권교체, 북한을 겨냥해선 선제공격을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는 전임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의 다자주의 외교를 “미국의 주권을 다른 나라에 넘기는 행위”라며 맹비난하고 미국 우선주의 혹은 미국 일방주의 외교를 주창해왔다. 지난 대선 때 그가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 것은 이런 세계관 때문이다.
볼턴은 북한과 악연이 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당시 국무부 국제안보담당 차관이었던 그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그는 2003년 서울을 방문해 ‘기로에 선 독재’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포악한 독재자’로 불러 북한으로부터 ‘인간쓰레기’라는 오명을 얻었다. 볼턴은 2007년 발간한 〈항복은 옵션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자신에 대한 북한의 비판을 두고 “재임 중 내가 받은 최고의 찬사”라며 비꼬았다. 그는 이 책에서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 파기가 자신의 핵심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지적해 눈길을 끈다. 그는 공직을 떠나 보수 성향 미국기업연구소(AEI)에 둥지를 튼 뒤에도 북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는 〈폭스뉴스〉의 해설가로 맹활약하며 자신의 호전적 대북관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로 인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볼턴이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자 정상회담에서 어떤 합의도 도출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볼턴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직후 뉴욕의 〈캐츠 라운드테이블〉이라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정상회담과 관련한 북한의 의도가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 완성을 위한 ‘시간 벌기용’은 아닌지 의구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핵무기 포기 의향, 포기 방식, 반출 방식 등 북한 비핵화 문제의 본론으로 빠르게 들어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볼턴은 북한 비핵화가 리비아식 ‘선 핵폐기, 후 보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이 방식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놓은 “비핵화를 위해 단계적이고 동시적 행동을 해야 한다”라는 견해와 충돌이 불가피하다.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가 회담 준비 주도
문제는 호전적 대북관으로 무장한 볼턴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대북 전문가인 스티븐 해거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는 〈NK뉴스〉에 게재한 글에서 볼턴의 국가안보보좌관 취임에 따른 부정적 견해를 밝히면서도 “오히려 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해 관심을 끌었다. 해거드 교수는 “트럼프는 특정 외교 현안에 관해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 정책도 트럼프의 기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결국 대북정책의 흐름을 결정할 사람은 볼턴이 아니라 트럼프다”라고 말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분석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는 〈시사IN〉과 인터뷰하면서 “현재 미국의 대북 노선은 이미 잘 확립된 상태다”라며 향후 볼턴의 역할에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메릴 박사는 “트럼프는 김정은과 ‘햄버거 정상회담’을 고대하고 있다. 중앙정보국(CIA)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가 정상회담을 위한 막후 준비에 한창이다. 폼페이오는 국무장관에 취임한 뒤에도 중앙정보국 분석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트럼프에 대한 자문 기능을 충족시킬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보다는 폼페이오에게 더 의존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메릴 박사는 “트럼프가 폼페이오에게 북·미 정상회담 관련 실무 준비를 맡기는 등 대북 기조를 정한 상황에서 볼턴이 훼방을 놓기엔 너무 늦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3월28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직후 트위터에 “이제 김정은은 자기 인민과 인류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만남을 기대한다”라고 썼다.
볼턴이 ‘정직한 중재자’ 구실을 해낼 수 있을지 가늠해볼 변수는 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이 절대적인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와 대북 온건파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사이에서 매끈한 업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다. 대북 강경파 이미지가 강한 폼페이오는 CIA 국장 재직 시절 ‘코리아 미션센터’를 신설할 정도로 대북 문제에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다. 고급 정보를 바탕으로 북한에 관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티스 국방장관은 지난해 북·미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렉스 틸러슨 당시 국무장관과 함께 외교적 해법을 주창했던 대표적 온건파다.
볼턴이 폼페이오·매티스 두 실세 장관의 틈바구니에서 이들을 제치고 트럼프 대통령의 눈과 귀를 독차지하려 할지, 아니면 ‘정직한 중재자’ 노릇을 할지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 톰 니컬스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볼턴이 자신의 어젠다를 고집한다면 국가안보회의 내 분열과 부처 간 정책 조정 마비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메릴 박사는 “만일 (볼턴이) 국가안보보좌관이라고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며 트럼프를 화내게 할 경우 임기를 한 달도 채우지 못한 마이클 플린 보좌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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