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10월, 중국 마오쩌둥 주석은 “반(反)혁명 분자 소탕”을 지시한다. 타이완으로 쫓겨난 국민당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자, 해외 제국주의 국가의 ‘비밀 요원’, 그 밖의 수상쩍은 인물 등이 대상이었다. 주석의 입에서는 1000명 중 한 명 이상이 반혁명 분자일 거라는 암시마저 나온다. 상명하달의 1인 독재 체제에서 최고 지도자의 한낱 어림짐작이 조직의 하부로 내려가면 ‘사실’로 굳혀지게 된다. 현장 실무자 처지에서는, 예컨대 성(省)의 인구가 1000만명이라면 1만명 이상을 처형해야 한다. 실제로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기 위한 실무자들의 경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수사기관이 실체적 증거로 ‘위법(반혁명) 행위’를 입증하고, 판사가 검사와 변호인 간의 법정 공방으로 유무죄를 가린 뒤 범죄의 경중에 따라 형법에 정해진 처벌을 가하는 법치주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무법천지에서 1년여 동안 대대적인 학살극이 벌어졌다. 1954년 류사오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모두 71만여 명을 처형했다고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보고한다. 당시 중국 인구(5억5000만명)를 기준으로, 1000명당 1.2명이 반혁명 분자로 처단된 것이다.

ⓒXinhua3월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만장일치로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학살이 진행될 당시 각 도시의 육상 경기장 등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와 함께 공개 집단 처형이 이뤄졌다. 주최 측(공산당)의 일방적 고발과 일부 군중의 질타로 반혁명 분자의 운명이 갈렸고 곧바로 집행되었다. 중국사 전문가 프랑크 디쾨터 교수(홍콩 대학·인문학)는 에스터 처오라는 젊은 공산당원이 집단 처형에 참여한 경험을 채록했다. 그녀가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 부근의 처형장으로 가니, 양손을 등 뒤에서 철사로 결박당한 사람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공안(경찰) 대여섯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뒤통수에 총을 쏘았다.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튀는 끔찍한 모습에 에스터는 고개를 돌렸다. 당 간부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억지로 그 광경을 보게 하면서 고함쳤다. “잘 봐! 혁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해방의 비극〉).”

혁명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 하나로 수많은 인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박탈하며 공포로 찌들게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선거를 통한 집권, 삼권분립, 개인 권리 보호, 법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사회’의 장단점을 나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빈부격차 심화, 식민지 쟁탈 및 세계전쟁, 민주주의 파괴로 나아가는 양상을 지켜보며 ‘근대보다 우월한’ ‘근대 이후(post-modern)의 시스템’, 즉 공산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다만 혁명 이후에도 상당 기간 ‘노동자·인민의 권력(공산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지배계급을 억압(독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혹은 인민독재)’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은 이후 중국이나 북한처럼 공산당(노동당)이 선거 없이 국가권력을 영구 독점하는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장치로 전락했다.

20세기 초·중반, 중국과 러시아 사회주의 현실은 혁명가들의 꿈과 거리가 멀었다. 당초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꿈이 실제로 이뤄진 나라에서는 최고 통치자 1인만이 자유로웠다. 현실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근대 이후’로 착각한 ‘전(前)근대’에 불과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 최고 지도자 지위에 오른 덩샤오핑은 ‘독재’의 모순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때 마오쩌둥의 손발로 무자비한 살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문화혁명의 희생자로 전락한 경험을 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전 중국은, 최고 권력자나 집단(공산당)이 법률과 무관하게 인민의 생명은 물론 재산과 인권까지 박탈할 수 있는 나라였다.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 국가였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법치였다. 국가(통치세력)는 미리 정해놓은 법률로만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 등을 침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마오쩌둥의 중국에서는 형법도 민법도 제정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을 선언하면서 법치주의를 제창한다. “법제도가 강화되어야 한다. 공산당은 법에 의거해서 통치해야 한다. 그리고 법률과 제도는 지도자가 교체된다고 해서 바뀌면 안 된다.” 그 이듬해에 비로소 형법이 제정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법치주의가 필요했다.

ⓒAP Photo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에 끌려나온 사람들.
‘주자파(자본주의 추종자)’ ‘대반역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공산주의자였다. 공산당이 선거 없이 국가권력을 영구 독점하고, 공산당이 국가(법률) 위에 있는 정치체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절충적인 노선을 취한다. 공산당 내부 규율을 바로 세우는 방안이다. 어차피 공산당이 다스리는 나라다. 공산당의 내부 규율을 강화하면 중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 당시처럼, 지배세력인 공산당 내의 권력투쟁(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이 국가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위험성을 최소화해야 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내의 여러 분파가 협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집단지도체제’, 최고 지도자가 임기 중반쯤에 후계자를 지명토록 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등 불문율을 정했다. 그는 “공산당이 헌법과 법률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라는 규약도 만들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에서는 공산당 지도부의 의사에 따라 헌법과 법률이 제·개정된다. 다만 덩샤오핑이 공산당과 국가(법률)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를 거치며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발전해온 중국 법치주의는 최근 들어 다시 역류에 휩쓸리게 된다. 지난해 10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부터 올해 3월 전인대까지 이뤄진 권력 재편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의 권력이 마오쩌둥 이후 유례없는 수준으로 강화된 것이다.

중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는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있다. 형식상으로는 공산당과 국가가 분리되어 있다. 공산당이 내부 회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 몇 개월 뒤에 열리는 국가 차원의 행사에서 승인되는 순서이다. 지난해 10월 열린 ‘제19차 당 대회’가 바로 ‘공산당의 내부 회의’다. 제19차 당 대회에는 2300여 명의 지역 당 대표들이 참여해 중앙위원회(명목상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 위원 204명을 뽑았다. 중앙위원들은 다시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했다. 중앙정치위원들은 다시 7명의 상무위원을 뽑았다. 이 상무위원들이야말로 공산당 및 국가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들이다. 7명은 시진핑을 총서기(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재선출했다.

지역 공산당 대표들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위원 133명도 선출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공산당 내부를 감찰하는 사정기관이다. 공산당이 곧 국가인 중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감사원보다 오히려 강력한 권위를 지녔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시진핑 주석이 2013년 초에 최고 지도자에 오른 뒤 ‘반부패 전쟁’을 주도하며 그의 정적들을 숙청해왔다. 그 총책임자(서기)는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리는 왕치산이었다.

지난 당 대회에서 가장 주목된 사건은 당장(黨章:중국공산당의 이념, 조직 등을 규정한 당내 헌법)의 개정이었다.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긴 문구가 당장에 들어갔다. 현대 국가들에서 사람 이름이 당헌이나 국가 헌법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은 예외다. 시진핑 주석 이전에도 이미 4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도이념으로 당장과 헌법에 들어간 것은 이상하지 않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이름은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이란 문구로 들어가 있다. 중국에서 사상이 ‘통합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이라면, 이론은 ‘특정 시대의 정치 노선’을 가리킨다. 즉, 공산당의 이념 체계에서는 마오쩌둥이 덩샤오핑보다 한 수 위다.

덩샤오핑과 시진핑 사이의 지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이름이 아니라 정책 슬로건(‘삼개대표론’과 ‘과학발전관 사상’)으로만 당장과 헌법에 흔적을 남겼다. 장쩌민의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은, 공산당이 노동자·농민(인민)뿐 아니라 지식인과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표한다는 내용이다. 개혁·개방 이후 공산당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용인하고 심지어 주도해야 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수없이 양산된 자본가들을 적대시한다면 공산당은 국가와 전체 인민을 대표한다고 자처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은 시장경제 부작용에 대한 공산당의 위기감을 반영한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발전에 대해 사고하면서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성취하자는 이야기다. 이 같은 당장에 ‘시진핑’이란 이름이 마오쩌둥에게만 적용됐던 ‘사상’을 달고 삽입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에게 고도의 이념적·윤리적·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사상, 덩샤오핑은 이론, 시진핑은?

ⓒXinhua덩샤오핑(왼쪽)은 장쩌민(오른쪽)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공산당에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이미 중국의 웹사이트에서는 ‘중국 역사 3단계론’이란 담론이 떠돌고 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세웠다면, 덩샤오핑은 부유하게 했고, 시진핑은 강하게 만들었다.” 시진핑 주석이, 마오쩌둥은 물론 덩샤오핑과도 구별되는 ‘신시대’를 열어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시진핑 주석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제19차 당 대회는 또한 지난 5년(2013~2017, 시진핑 1기) 동안 시진핑 주석의 정책 슬로건을 100% 당장에 집어넣었다. ‘반부패 투쟁’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 주도의 ‘신 실크로드 전략 구상’) ‘공급 측면 구조개혁’ 등이다(30~32쪽 기사 참조).

 

시진핑 주석이 제19차 당 대회에서 이루지 못한 일은 ‘오른팔’인 왕치산을 공산당의 최고 권력층인 상무위원으로 유임시키지 못한 것 외에는 없다. 당 대회를 통해 장기 집권의 신호까지 인민들과 전 세계에 타전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은 10년(1기에 5년씩 모두 2기)에 걸쳐 공산당의 총서기와 국가주석 직을 맡았다. 집권 2기가 시작되기 직전 당 대회에서 아래 세대의 ‘젊은’ 당원(주로 50대)을 상무위원(현재 7명)으로 올리면, 그가 후계자로 해석되었다. 덩샤오핑이 만든 불문율이다. 이번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50대 중 누구도 상무위원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을 노린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 예측은 제13기 전인대에서 적중되었다.

공산당의 의지를 국가 권력기구 재편으로 구체화하는 행사가 전인대다. 당 대회에는 공산당원만이 참여한다. 전인대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 중에는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도 많다. 형식상 전인대는 공산당뿐 아니라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전인대가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국가원수인 주석과 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국가의 최고 군사지휘 및 의사결정기구) 주석, 행정부인 국무원의 총리와 그 구성원 등 주로 국가기구의 책임자를 선출하거나 임명한다. 헌법과 법률의 제·개정도 전인대의 권한이다.

지난 3월20일 폐막된 전인대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진핑을 국가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재선출했다. 그는 2013년 3월에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어 이미 1회의 회기를 마쳤다. 재선출로 보장된 회기는 2023년 초까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헌법은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회기(1회에 5년)를 2회로 제한해왔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재임 기간은 둘 다 10년(5년 임기를 2회 맡음)이었다. 이번 전인대는 국가 헌법에서 주석과 부주석의 ‘2회기 제한’을 삭제해버렸다. 찬성 2958표에 반대는 2표에 불과했다(무효 1표). 시진핑 주석이 다음 전인대가 열리는 2023년 초 이후에도 국가주석을 맡게 될 가능성이 열렸다. 마오쩌둥처럼, 사망할 때까지 집권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국가 헌법에도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인대에서 전체 국가·사회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공포했다. “당이 공산당, 정부, 군대, 민간, 학계는 물론 모든 지역(동서남북중)을 영도한다”라는 마오쩌둥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행정부인 국무원과 그 총리인 리커창의 권한이 매우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무원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해온 것을 감안하면, 시진핑 주석과 공산당이 직접 경제 부문을 챙기겠다는 이야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자신의 ‘핵심 경제 자문관’으로 불리는 류허를 국무원 경제담당 부총리에 앉혔다. 류허도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리는 인물이다. 벌써 ‘총리보다 강한 부총리’란 말이 나온다. 2010년대 초반까지 ‘차기 최고 지도자’로 시진핑과 함께 물망에 올랐던 리커창으로서는 대단한 굴욕이다.

‘2회기 제한’ 삭제로 장기 집권 기반 마련

ⓒ트위터 갈무리공산당이 국가주석의 2회기 제한 규정을 폐지한 것에 대해 중국 유학생들이 붙인 비난 포스터.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이 행정부(국무원)를 더욱 강하게 통제하리라 보이는 징후는, 국무원의 핵심 부서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의 몰락이다. 발개위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을 사실상 책임져온 부서다. 산업정책과 개발 계획을 수립·승인하고, 국가 투자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었는지 감독해왔다. 주요 상품·서비스의 가격도 책정했다. 심지어 시진핑 1기 때부터 강조된 기후변화 대응 및 오염물질 관리도 발개위의 소관이었다. 시장독점 감시도 맡았다. 한국이라면 과거의 경제기획원에 지금의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을 모두 합친 정도로 비대한 조직이다. 리커창 등 경제 관료들의 권력 기반인 동시에 정경유착을 통한 부패 사건의 중심이기도 했다. 전인대가 발개위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기능을 축소하거나 신설된 자연자원부, 농업농촌부 등으로 이관했다. 명분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자원 배분을 활성화해서 중국 경제를 현대화”한다는 것이다(30~32쪽 기사 참조).

또한 막강한 사정기관인 국가감찰위원회(국가감찰위)를 신설했다. ‘반부패 투쟁’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정부패 단속기관으로는 공산당 내부에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있지만 조사 대상이 당원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국가감찰위는 당원은 물론이고 공무원, 기업인, 지식인, 문화인 등 공공 부문과 연관 있는 인사라면 누구나 사찰할 수 있다. 권한도 매우 강하다. 혐의만으로 변호사 접견 없이 최대 6개월 동안 구금할 수 있으며 재산 동결 및 몰수 권한까지 지녔다. 시진핑 주석의 정적과 비판세력을 잠재울 ‘몽둥이’가 될지도 모른다. 국가감찰위 초대 주임인 양샤오두는 시진핑과 왕치산의 측근 중 측근이다.

이렇게 덩샤오핑 이래 집단지도체제가 막을 내렸다. 최고 지도자의 장기 집권 가능성도 열렸다. 공산당과 주석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면서 ‘국가 위의 당’을 어느 정도라도 법률의 틀 속에 가두려고 했던 덩샤오핑의 투쟁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 법치주의의 위기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5년 동안 반부패 투쟁을 통해 정적들을 숙청한 끝에 무소불위의 몽둥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 몽둥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는 중국 국영기업에 자리 잡은 기득권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시장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 반대로 언론 및 개혁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국가감찰위를 활용하면서 계획경제를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시진핑 1인 독재 체제가 개인숭배와 인권 탄압, 계획경제로의 역류 등으로 이어진다면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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