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쪽의 특사단을 만나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비핵화 발언을 전해 듣고 기분이 묘했다. 남쪽의 ‘귀빈’을 앞에 두고 웃는 표정으로 얘기했지만, 지난 세월에 대한 그의 회한이 느껴졌다.

남북관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확연히 갈렸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승리에 도취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을 폄하하는 발언을 무절제하게 쏟아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이명박 역도’라는 표현으로 상징된다. 2008년 4월1일 〈노동신문〉에 그 표현이 처음 실렸다. 그리고 남북관계에는 긴 ‘겨울’이 찾아왔다.

ⓒ평양 조선중앙통신3월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환영 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지난 1월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를 시작으로 남북관계는 동면을 깨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4월27일 2018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이어 5월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급기야 양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3월26일, 북한의 ‘1호 열차’가 전날 극비리에 단둥을 통과해 베이징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 정상회담이 전광석화처럼 합의되었을 때, 이 생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북한의 다음 순서가 ‘경로 의존적’으로 진행되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한 것이다. ‘1호 열차’ 소문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금 ‘과거로의 기억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를 잇는 백두혈통다운 행보다. 즉 선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끊어진 선로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역사적 사건의 경로는 지정학에 좌우된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을 은둔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유럽 언론을 인용한 말이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이 아니었다면 한·중 수교 후 10년간 단절 상태였던 북·중 관계 재개가 가능했을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처지도 비슷하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라는 경로를 정한 후에야 6년간 반목해온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이 가능했다. 남북이 서로를 의지할 때 ‘지정학적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실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안보보좌관에 강경파 존 볼턴을 임명하자,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방중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이다. 그런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경로를 읽은 다음에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2000년 5월 시작된 불화의 씨앗  

6·15 남북 정상회담을 보름 앞둔 2000년 5월29~31일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김정일 방중 경로’ 자체가 여러 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6년간 한 번도 중국을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본인이 평소 즐겨 타지 않는 아버지 세대의 구식 열차를 타고 아버지의 일정 그대로 베이징의 실리콘밸리 중관춘(中關村)을 찾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중국 지도부에게 2000년대 내내 양국 수뇌부 사이 불화의 씨앗이 바로 2000년 5월부터 시작된 것임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2000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했다. 이번처럼 김정일 위원장의 방문도 비공식으로 이루어져 방문 목적이나 의미 등이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뒤 단편적으로 흘러나온 뒷얘기들을 종합해보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방문 목적과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됐다. 하나는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한 종잣돈 마련이다. 2000년대 북·중 양국 수뇌부의 최대 쟁점이었던 경제 개발 차관 문제가 바로 이때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됐다. 두 번째는 이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찾은 베이징 중관춘 방문 자체가 목적이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호 열차’를 타고 중국에 가서 ‘과거로의 기억 여행’을 했다.

이 두 가지가 갖는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관춘 방문부터 살펴보자. 북한에 1990년대는 시련의 세월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대홍수 등 천재지변까지 겹치면서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었다. 300만명이 굶어죽는 아비규환의 시절이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미국과 관계에서 그나마 한시름 놓게 된 북한 수뇌부는, 경제 회생을 위한 비밀계획을 수립했다. 대북 소식통들이 비밀 청사진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기 시작한 때가 1996년 즈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2010 계획’이라고만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2001년이 되어서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2002년까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2012년에는 우리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과도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이 계획의 요체였다. 계획이 3년째에 접어든 2005년에 중간 결산을 해 향후의 방향을 조정하기로 했다.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북한은 대량 아사를 경험한 나라다. 먹고사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나라의 시스템을 바꿔야 할 판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정은 세대의 집단적 성격 형성에까지 이 계획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는 1차 목표 연도인 2002년을 겨냥한 모색기였다. 1996년 북한 정무원이 획기적인 계획을 입안했다. 바로 신의주·남포·원산을 미국과 일본에까지 보세가공구로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1991년 나진·선봉에만 ‘모기장 같은 특구’를 개방하겠다는 계획에 비하면 실로 대담했다. 1994년 미국과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미국·일본과의 관계가 계획처럼 풀리지 않으면서 획기적인 개방 계획은 책상 서랍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1998년 9월 김정일 위원장이 3년간의 유훈통치를 끝내고 국방위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중요한 회의가 비공식으로 열렸다. 나진·선봉특구 같은 지엽말단의 개방정책으로는 더 이상 경제 활로 모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국가 전체의 전면 개혁, 시장경제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7월1일부로 시행한 북한식 경제 개혁·개방 정책인 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조치)의 씨앗이 이때 뿌려졌다.

바야흐로 세기말이었다. 북한 사회도 21세기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999년 과학기술 중시 방침이 천명됐다. 2001년에는 신사고 운동이 전개됐다. 2001년 1월9일자 〈노동신문〉은 ‘우리는 21세기의 사람들이다’라는 선언까지 했다. 베이징의 중관춘은 바로 북한의 21세기가 지향해야 할 좌표였다. ‘인터넷과 첨단기술의 결합’을 통한 ‘단박 도약’. 김정일 위원장의 머릿속에 떠돌던 ‘신사고 발전전략’이 구현된 현장이 바로 중관춘이었다(김정일 시대의 신사고 발전전략은 김정은 시대에 ‘새 세기 산업혁명’으로 진화한다).

“장군님이 뭘 보고 오셨기에 저러시나”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5월 중관춘 방문과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강력하게 내부 변화를 추동했다. 당시 북한 고위층들이 “장군님이 뭘 보고 오셨기에 저러시나”라며 중관춘을 줄지어 방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2000년 7월, 그동안 책상 서랍에 처박아뒀던 신의주·남포·원산 개방 계획이 다시 빛을 보았다. 단순 보세가공 구역에서 지역별 산업특화 전략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다음 해인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상하이 방문, 2002년 9월 신의주 경제특구 계획이 이렇게 시작됐다.

문제는 돈이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돈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2000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당시 최대 현안 역시 바로 자금 마련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종잣돈, 즉 차관을 얻고자 함이다. 북한은 중국이 ‘당연히’ 차관을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굳이 혈맹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압박을 막아내며 동북 3성의 방벽 노릇을 하는 게 북한이었다. 더구나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를 일방적으로 통고하면서 북·미, 북·일 수교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북한은 중국에 ‘청구서’를 당당히 내밀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요구한 액수는 30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10억 달러만 제공했다. 그것도 한 번에 주는 종잣돈이 아니라 먹고사는 데 쓸 자금을 나눠 지급했다. 전력 에너지 분야에 각 3억 달러, 식량 농업 분야에 각 2억 달러로 두 차례 나누어 제공하는 식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도움은 되었지만 결국 빈손으로 ‘2010 계획’의 첫 번째 목표 연도인 2002년을 맞았다. 어쨌건 시장경제 요소 도입을 근간으로 하는 7·1 조치가 계획대로 시작됐다. 자금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신의주 경제특구 도입과 북·일 수교에 희망을 걸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양빈 어우야그룹 총수와 손을 잡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양빈은 50억 달러를 끌어들이겠다고 북한에 제의했고,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굴욕을 무릅쓰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사과하면서 고이즈미와 정상회담을 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100억 달러에 이르는 수교자금을 종잣돈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연합뉴스2000년 5월30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만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

하지만 중국과 일본 양측에 의해 각각 무산되었다. 중국은 장쩌민 주석이 추천까지 했던 양빈이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를 뇌물 공여와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 수교에 열정적이었지만 관방 부장관이었던 아베 현 일본 총리가 납치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세기말 불운을 딛고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겠다던 북한의 계획은 이렇게 동력을 잃어갔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시장경제 도입(7·1 조치)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2004년이 되자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이 깊어졌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4년 4월 장쩌민 주석을 만나 다시 차관 제공을 요구했다. 그러자 장 주석은 신의주를 중국의 조차 개발지로 넘기면 도와주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신의주를 시작으로 평양까지 중국 영향권에 넣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뒤로 이 조차 개발 문제가 양국 수뇌부의 뜨거운 쟁점이었다.

결국 2010 계획은 결론이 났다. 7·1 조치를 더 이상 밀고 나가기 어려웠다. 시장(장마당)은 폐쇄됐고 7·1 조치 실패 책임을 물어 박봉주 내각 총리는 지방 공장으로 쫓겨났다. 새로운 세기 신사고를 앞세워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진입하겠다던 꿈은 좌절됐고 반동의 계절이 돌아왔다. 군을 앞세운 강성대국 논리가 시작된 것도 이때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앙팡테리블(무서운 세대)’이 육성됐다. 바로 김정은 세대다. 앞 세대가 시장 개혁을 고민한 세대라면 김정은 세대는 핵을 앞세운 부국강병으로 사상 무장을 한 세대다(〈시사IN〉 제227호 ‘김정은 세대는 누구인가’ 기사 참조). 김정은 세대는 아버지 세대인 김정일 위원장이 외교에 의존한 시장 개혁을 추진할 때 주변국이 어떻게 했는지 보고 자란 세대다. 이들에게 핵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진리다. 지난해 9월 이후 김정은 세대는 올해 9·9절까지 핵보유국 노선을 완성한 뒤 미국과 담판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압박으로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자, 2016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시도했던 비핵화·경제보상 노선으로 한발 물러섰다.

주목할 점은 비핵화·경제보상의 협상 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으로부터 비핵화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이미 확인됐다. 2016년 9월 5차 핵실험 직후부터 시작한 비핵화 협상 역시 중국을 상대로 했다. 2016년 8월부터 지난해 3월31일까지 핵 폐기 대가로 500억 달러를 요구하는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말 협상은 일단 무산되었다(〈시사IN〉 제506호 4월 ‘한반도 위기설 어떻게 지나갔나’ 기사 참조). 그래서 이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은 사실상 그 두 번째 협상에 해당한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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