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걸그룹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했다. 남성들 사이에서 팬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이 이어지고, 아이린의 사진을 태우거나 자르고,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라는 반응도 나왔다. 말 그대로 난리였다. 같은 날 동덕여대 학생들은 하일지 교수 파면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그가 수업 중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를 모욕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 그가 지금껏 일삼았던 온갖 여성혐오적 언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자들은 자신을 강간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장애인은 성관계를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여류 작가 냄새가 나는 것들을 혐오한다’. 심지어 그 역시 여러 학생을 성추행한 가해자였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한 마디를 잘못한 사람은 한 마디만 잘못하지 않는다. 말을 잘못한 사람은 말만 잘못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 날 나는 출신 학교가 아님에도 동덕여대에 갔다. 그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 벽에는 노교수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직접 진실을 찾아 나서겠노라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언어는 사고를 확장한다. 남성이 여성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철저히 억압했던 역사가 긴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최근 아주 짧은 역사 동안 여성 입지가 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책 읽는 여자는 오랫동안 찾아보기 어렵다가, 노골적인 박해를 받았다가, 은근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린 에피소드’는 동덕여대에 도착한 순간에도 내내 화제였다. 그녀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은 일반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온화한’ 소설이다. 여성이 그저 여성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게 공분을 일으킨 사건에서, 이 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이린에 분노한 남성도, 아이린에 분노한 남성에 분노한 여성도 다 안다.

이것은 한 명에게 일어난 한 번의 해프닝이 아니다. 여성들이 학교에 간다고 했다가 책을 찢기거나 얻어맞던 시절도 있었다. 남성들의 분노는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직접 찾아 나서고 확장하는 데 대한 분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분노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면 더는 이전과 같이 여성을 통제할 수 없다는. 여성의 분노는 전처럼 가만히 통제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한 불길은 사그라질 것이 두려워 타오르고, 다른 불길은 이제야 지펴진 것에 분개해 타오른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을 써나갈 것이다”

많이 읽다 보면 쓰기 마련이다. 동덕여대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쓴 또 다른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이제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을 써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도 적혀 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 이런 시대를 끝내자.” 읽다 보면 쓰게 되듯이, 사고는 언어를 낳고 언어는 또다시 사고를 낳다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은 모여 변화가 된다. 그날 하일지 교수는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나는 부끄럽지 않고, 진실을 말했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다. 나중에 말하자. 보도 자료를 봐라.” 궁색하고 조악한 이 말은 놀랍게도 무려 20년간 교수직에 몸담고 평생 문학만을 추구했다던 이의 입에서 나왔다. 약동하는 학생들의 말과 달리 정체된 말이었다. 여태 우리는 겨우 이런 말들을 문학이라 추어올렸던가.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글을 쓰는 순간이 오기를 애써 막았던가. 이렇게 한 시대가 간다.

기자명 이민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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