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8일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밴디 리 교수(예일 대학 의과대학원 법·정신의학부)는 쇄도하는 전화와 이메일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트럼프 후보 당선으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우려하는 각계의 목소리들이 폭력 연구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인 그를 긴급히 찾고 있었다. 우려는 빗나가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 이후 물리적·언어적 혐오 범죄가 전례 없이 급증했다.

오랜 동료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 교수(하버드 대학 의학대학원 정신의학과)가 오바마 당시 대통령에게 ‘당선자의 신경정신과 검사를 요구하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밴디 리 교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의회에 보낼 편지를 함께 작성해 동료들에게 회람했다. 공동 서명을 받아 제출할 예정이었다. 리 교수는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트럼프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이 “당선자의 사납고 공격적인 장광설, 음모론적 망상, 사실 회피, 폭력에 대한 호감을 목격하고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 동료 시민에게 존중을 표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동료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시사IN 이명익밴디 리 교수(사진)는 “폭력을 예방해야 하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네 의견에 동의는 하지만 서명은 못하겠다고 했어요. 너무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죠. 공포가 사람을 자기 검열로 내몰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의회로부터도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이듬해 4월20일 리 교수는 ‘우리의 직업적 책임에는 경고할 의무도 포함되는가’라는 제목의 콘퍼런스를 자신이 소속된 예일 대학에서 열었다. 뒤에서 돕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조직위원회에 함께 이름을 걸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도 여느 때처럼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공동 주최자가 되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콘퍼런스 당일 제임스 길리건, 로버트 제이 리프턴 등 정신의학계의 별들이 발제를 하기 위해 예일 대학에 도착했다. 현장 참가자는 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초라해 보였던 콘퍼런스의 후폭풍은 거셌다. 콘퍼런스가 침묵을 깨는 구실을 했다. 온라인으로 콘퍼런스를 모니터링한 100여 명이 씨앗이 되어 약 1700명의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경고의 의무’라는 단체를 공동 창립하게 됐다. 콘퍼런스의 발제문만을 묶어서 출판하려던 계획도 수정했다. 리 교수가 추가 기고문을 받아 출판용 원고를 정리하는 동안 여러 출판사가 판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했다.

밴디 리 교수를 비롯해 27명의 정신건강 전문의들이 필자로 참여한 책은 2017년 10월 〈The Dangerous Case of Donald Trump〉(한국어판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2018년 2월 출간)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밴디 리 교수는 책 출간 이후 미국 의회에서 비공개로 관련 내용을 증언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정신감정 의무화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 의원 11명과 공화당 의원 1명이 대상이었는데, 리 교수의 증언 이후 이 법안에 찬성하는 의원이 60명으로 늘어났다. 미국 의회 의원 535명의 10% 정도다. 이후 리 교수는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살해 협박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3월20일 봄방학을 틈타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밴디 리 교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행동했고 ‘트럼프가 위험하다’라는 제 의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책을 낼 당시에는 우리의 분석이 예측이었다면 불행히도 지금은 그것을 증명하는 통계를 갖게 됐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AFP PHOTO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에서 백인우월주의 살인 범죄와 총기 사건이 증가했다.
트럼프 당선 후 불안에 시달리는 환자 급증

트럼프 대통령 취임 2주년에 접어든 현재 리 교수에 따르면 백인우월주의 살인 범죄는 2배 이상, 총기 사건은 30% 이상 증가했다. 실제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전역의 심리치료사들은 상담 시간에 전례 없이 많은 정치 문제를 다뤄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고도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신규 환자가 급증했다. 대통령이라는 위치에서 하기에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신의학과 업무에 ‘선거 트라우마’를 포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리 교수의 행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포함된 ‘정치적 의도’를 읽고 싶어 한다. “제가 정치적 동기로 제 전문성을 이용했다면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지금 정치가 제 전문 분야인 폭력 예방을 ‘침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폭력을 예방해야 하는 상황과 현실 정치가 겹치게 된 이 상황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제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책임을 방기하는 거예요.”

리 교수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 브롱크스로 이주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미국 내 다른 인종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경험의 폭이 넓어질수록 질문도 커졌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폭력이 있는지, 왜 사람들은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질문은 숙제가 되었다.

의사였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밴디 리에게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특히 내과의로 서울대 학장 자리도 마다하고 수십 년간 국립병원에서 근무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던 외할아버지 이근영 박사의 영향은 지대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진료실에서 외할아버지를 도왔던 어머니로부터 듣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전설이고 신화였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 의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윤리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이미 다 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동심리 전문의로 미국 내에서도 빈곤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어머니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딸은 2016년 어머니 장례식에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장례가 치러진 예배당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꽉 찼다. 문 밖까지 몰려든 추모객 수백명은 집 밖에 더 오래 머물렀던 어머니의 삶을 증언해줬다.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당신의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습니다”라며 낯모르는 이들이 감사를 표했던 순간을 리 교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어머니 장례식과 책 출간 시점이 겹쳐 있었어요. 겁이 나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어머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

의대 내 여러 과목 중에서 정신의학을 선택한 건 자신이 내내 품고 있었던 폭력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서 의료인류학을 연구했다. 미국 내 최대 구금시설이자 최악의 교정시설로 꼽히는 리커스 아일랜드의 개혁을 주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세계보건기구에서 폭력을 공중보건 의제로 다루도록 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런 리 교수가 ‘트럼프 문제’를 제기한 후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든 싸움의 한복판에 서야 했다. 상대는 대통령이다. 스스로 “나는 안정적인 천재다”라며 논란을 일축해버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의 무분별한 폭언 및 비난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그와 동료들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비판은 따로 있다. ‘골드워터 규칙’이다. 1964년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정신의학자들이 직접 검진하지 않고 진단을 내렸다가,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려 패배한 이후 골드워터 규칙은 미국정신의학협회(APA) 윤리강령에 포함됐다. 이후 직접 대면하지 않은 공인에 대해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미국정신의학협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건강에 대한 논란을 인지한 듯, 취임 두 달 만에 이례적으로 골드워터 규칙을 재확인하는 별도의 성명을 발표했다. 진단은 물론이고 자신의 전문적 지위를 이용한 논평까지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일종의 함구령이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골드워터 규칙이라는 것도 공중보건에 기여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 공중보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면 판단을 달리해야 합니다. 경보를 울려야 할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을 충분히 목격했는데도 전문가들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요구한다면 멈춰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리 교수와 동료들은 골드워터 규칙보다는 ‘타라소프 규칙’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타라소프 규칙은 1969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딸을 잃은 부모가 소송을 제기하며 널리 알려졌다. 학교 내 상담소에서 남학생 프로센지트 포다르가 좋아하는 여학생인 타티아나 타라소프를 ‘죽이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경고를 하지 않았다는 게 소송의 이유였다. 재판관들은 비밀 엄수와 피해자 보호가 상충할 때 폭로가 타인의 위험을 막는 데 필수적이라면 비밀 엄수 의무가 중단된다고 판결했다.

리 교수와 동료들은 위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전문가이자, 증언하는 전문가다. 독자의 바람과 달리 이들은 570여 쪽에 이르는 책에서 단정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진단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정신질환자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우리가 고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구체적인 진단명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논평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힌다. “문제는 그가 위험한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위험합니다. 위험함은 정신의학적 진단이 아니에요.” 제임스 길리건 교수(뉴욕 대학 정신의학과)의 말마따나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열핵무기 1000기 이상의 방아쇠에 손을 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열핵무기 방아쇠에 손 얹은 ‘위험한’ 지도자

이들은 수정헌법 제25조 ‘대통령의 무능력과 승계’에 근거해 이 조항의 적용 범위 내에서 독립적이고 치우침 없는 검증단을 꾸릴 것을 요구하고,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해 세세한 안을 제시한다. 읽다 보면 이 내용은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려면 이러한 ‘검증’은 필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은 트럼프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장치에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저는 한 나라의 힘이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탄핵을 통해 그 힘을 발휘했죠(웃음).”

내친김에 물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정신의학자로서 어떻게 보고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수락한 배경에 자신을 둘러싼 스캔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고, 뉴스 헤드라인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바꾸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대화 국면을 만든 데는 한국의 공로가 제일 큽니다. 북·미 회담이지만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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