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게임은 곧 게임산업이었다. 수출 효자상품, 미래 신성장동력, 4차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라고 찬사받았다. 이 ‘기특한’ 산업의 앞날을 가로막는 학부모·의료인·정책 입안자들은 비난을 면치 못했다. ‘게임이 마약이란 말인가?’라는 반발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오는 6월부터는 판이 바뀔지도 모른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 11판(ICD-11)에 ‘게임장애(Gaming Disorder)’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ICD는 세계 각국의 질병 통계에 쓰이는 분류다. 질병 유형에 따라 정의와 증상을 나누고 각각에 알파벳과 숫자로 된 코드를 붙인다. 현행 ICD-10은 1990년 처음 공포됐다. 그간 일부 항목을 변경한 적은 있으나 이번과 같은 대규모 개정은 28년 만이다. 대부분 나라들이 ICD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일부 수정해서 자국에 도입한다. 5년마다 개정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역시 통계법에 따라 ICD를 기준으로 한다.

ⓒ연합뉴스2017년 11월16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국내 최대 게임전시회 지스타를 찾은 시민들이 온라인 게임을 체험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ICD-11 베타버전은 게임장애 항목을 신설했다. 여기서 정의된 게임장애란 ‘①게임에 대한 통제 불능(빈도·강도·기간 등) ②삶의 다른 관심사나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하는 일 증가 ③부정적 결과가 발생해도 게임 지속 또는 확대가 나타나는,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인 온라인·오프라인 게임 행동 패턴’이다. 그 결과가 개인·가족·사회·직업 등에 큰 장애를 초래할 정도로 심각하며, 최소 12개월간 증상이 분명히 드러나야 게임장애에 해당한다. 뜯어보면 마녀사냥과는 거리가 있다. 수면장애가 그렇듯, 게임 자체가 마약과 같다는 규정은 아니다. 게임이 일상생활인 프로게이머는 ②정의에 따라 제외된다. 게임을 계속해도 삶에 큰 문제가 없다면 ③정의를 적용해 환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나온 결정은 아니었다. ICD와 함께 정신의학 분류 기준의 양대 축인 ‘DSM-5’에서도 게임 문제가 떠올랐다. DSM은 미국정신의학협회(APA)가 내놓는 진단 기준인데, 2013년 DSM-5에 ‘추가 연구 요망 항목’으로 ‘인터넷 게임장애’를 넣었다. 그 뒤 5년간 게임장애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 2013년 WHO가 발족한 태스크포스에서 디지털·전자기기 과다 사용에 대한 공동 연구가 제안됐다. 2015년 ICD-11 초안 검토를 완료했고, 현재는 현장 조사 중이다.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ICD-11은 게임장애 항목이 포함되어 6월에 공포될 예정이다.

게임장애가 정식 질병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건강보험 적용이 핵심이다. 현재 게임장애는 질환이 아니기에 입원이 필요하더라도 비용을 환자가 부담한다. 의료 현장에서는 이 체계를 우회하기 위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등 다른 질환으로 진단하는 일이 잦다. 보험 적용이 되면 정확한 게임장애 통계가 잡힌다. 의사들이 ‘게임장애 질병코드’로 진료비를 청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ICD-11의 게임장애 항목이 국내에 적용된다면, 저소득층 치료와 질병 현황 파악에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비판이 나온다. 의학적으로 불분명한 기준이며, 악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3월9일 열린 ‘게임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진단 기준이 모호하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현상이 중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성과 금단현상이 동반돼야 한다. 게임은 이 부분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장은 “정신질환에는 완치가 없다고 한다. 게임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하면 ‘환자’에게는 일종의 사회적 낙인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게임장애 ‘환자’에게 적대감을 갖는다?

ⓒ시사IN 조남진게임장애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낸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위)과 이형초 감사와기쁨 심리상담센터장(아래).
이해국 가톨릭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내성과 금단현상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한다. 물질중독과 행위중독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게임장애는 보건의 영역” 기사 참조). 물질중독의 원인은 담배·술·마약 따위다. 행위중독은 비교적 최근 도입된 개념으로, 물질 없이 뇌의 보상회로가 자극되고 중독을 유발하는 현상이다. 도박·게임이 여기에 속한다. 이 교수는 “내성과 금단현상이 물질중독에서는 핵심적이지만 행위중독에서는 아니다. ‘점점 게임에만 몰두하는 것’을 내성으로 볼 수 있고, ‘안 하면 괴로운 것’을 금단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라고 했다.

‘낙인’ 문제가 남는다. 게임장애를 질환으로 정의하면 사회는 게임중독자들에게 더 적대감을 갖게 될까? 지난해 〈한국사회복지학〉에 실린 논문 ‘행위중독에 대한 사회적 낙인 과정’은 정반대 결론을 내린다. 이 연구는 인터넷 게임 중독 사례를 보여준 뒤 피험자들에게 정서적·행동적 반응을 물었다. 중독의 원인은 개인적 원인(나약한 성격, 의지력 부족, 잘못된 생활습관, 부도덕한 사고와 행동)과 생물학적 원인(뇌 질환, 신경전달물질의 장해)으로 나눠 제시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장애라고 인식한 사람들일수록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동정심을 갖고 도움을 주려 했다. 저자는 “행위중독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생물학적 장애이고, 회복 불가능하거나 타인에게 위험한 장애는 아님을 강조하는 반낙인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게임업계는 비상이다. 한국게임학회장을 맡고 있는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게임의 주된 플랫폼이 PC에서 모바일로 이동하면서 한국 게임산업은 정체·쇠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아이폰 도입이 늦었기에 후발주자로 시작했다. 게임이 질병으로 분류되면 업계는 치명타를 입는다.”

ⓒ시사IN 조남진이형초 감사와기쁨 심리상담센터장.
그러나 모바일 게임의 급부상이야말로 ICD-11의 배경이라는 의견도 있다. PC 기반 게임과 달리 이불 속으로 들어간 스마트폰은 부모가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심리상담센터 감사와기쁨 센터장인 이형초 박사는 “그간 중독 양상은 일부 청소년 남성에 국한됐다. 스마트폰 보급 이후 여성과 저연령층에서도 일반화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게임장애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담배나 도박에 비해 빠르게 질병으로 지정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게임장애가 아동·청소년에게 가장 접근성이 높은 중독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3세 이하 아동이 SNS에 가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도 비슷한 입법을 준비 중이다.

한국 정부는 ICD-11에 우호적이지 않다. 보건 전문가들이 제정하는 ICD와 달리,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개정은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통계청이 작성한다. 원칙적으로는 ICD-11을 그대로 반영하는 게 순서이지만 통계청 관계자는 “시간적 제약 때문에 2020년에 나올 KCD 8차 개정안은 ICD-11을 반영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오는 6월 WHO가 게임장애를 국제질병분류에 포함시켜도 이를 무시하겠다는 이야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ICD-11에 적대적이다. 게임 질병화에 반대하는 일부 전문가들과 함께 협의체를 꾸려 대응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게임은 중독이 아니라 과몰입될 수 있는 요인이 있는 콘텐츠일 뿐이다. 중독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정책을 다 엎어야 한다. 질병코드로 가야 한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학계에서 게임중독이 가장 심각한 곳으로 꼽는 나라가, 또다시 보건 대신 산업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