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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낳은 ‘난민’, 일본 인권운동가 되다

1937년 제주도 김녕에서 태어난 방정옥은 4·3의 참화를 피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본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고국을 찾곤 한다.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4월 02일 월요일 제5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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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옥은 1937년 제주도 김녕에서 태어났다. 방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47년 3월1일 동네 주민들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걸 또렷이 기억한다. 아버지는 3·1절 기념 대회에 참가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늘 감시당했고 경찰에 끌려가 며칠씩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아버지는 서둘러 목포로 일자리를 옮겼다.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이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했다. 목포 방정옥의 집에는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어 형기를 마친 제주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려운 살림에도 아버지는 그들을 먹이고 재워주고 여비까지 마련해 귀가를 도왔다.

해방 후 식량난이 심각했고, 4·3 이후 제주도는 더 힘들었다. 1949년 봄부터 어머니는 방정옥의 동생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일본에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제주 출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해상 봉쇄가 더 강화되었지만, 해방 후 귀향을 포기한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의 오사카나 도쿄는 제주인에게 육지보다 가까운 ‘생활공간’이었다. 어머니도 일본의 외삼촌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은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일본에서 사온 물건은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살겠다며 마지막 밀항선을 탔으나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모든 짐을 몰수당하고 일본 형무소에서 1년을 살고 풀려났다. 그 이후 어머니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76년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강정효 제공
2008년 제주 4·3 60주년 위령제에 참석한 방정옥씨(오른쪽)가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방씨의 어머니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밀항선을 탔다면, 오빠는 살아남기 위해 밀항선을 탔다. 같은 해 목포에서 고향 집으로 돌아간 오빠는 ‘아버지 어디 있냐’며 따라다니던 형사에게 ‘빨갱이’로 몰려 잡혀갔다. 운 좋게 풀려나자마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7년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의 비무장 시민들에 대한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섬 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약 3000명이 밀항선을 탔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으로 건너간 밀입국자 수는 1948년 8408명, 1949년 9437명이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에서 살기 위해 일본으로 빠져나간 방정옥의 ‘오빠’들이다. 제주 4·3이 낳은 ‘난민’이자,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이산’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목포까지 밀고 내려오자 ‘두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며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방정옥은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와 오빠에 이어 아버지까지 행방불명되어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1951년 초여름 ‘이제는 못 오시나 보다’ 포기하고 돌아간 고향에서 방정옥을 기다리는 것은 지독한 가난과 다섯 동생이었다. 처음에는 부잣집 딸이었던 어머니가 남겨둔 옷가지 등을 팔아 끼닛거리를 마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어릴 적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은 방정옥은 교회 일을 거드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집에서 24㎞ 떨어진 교회까지 걸어 다녔다. 친구가 가족들 몰래 보리며 좁쌀을 가져다주었다.

1965년 12월 스물여덟 살 방정옥은 오사카와 제주를 오가던 무역선 선장의 청혼을 받고 결혼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 그런데 현해탄에서 배가 침몰해 해상보안청에 체포되었다. 같이 체포된 32명은 모두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노력 덕에 아내로 인정받아 특별 체류 허가를 얻어 석방되었다.

주부에서 인권운동가로 거듭나다

일본인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일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방정옥은 1975년 국적을 ‘일본’으로 바꿨다(일본 이름 히라마 마사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 행해진 차별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민등록등본과 유사한 주민표에 한국 국적인 방정옥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미 없는 자식으로 오해를 받았고 따돌림을 당했다. 방씨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와사키 시가 운영하는 보육원 채용에서 떨어졌다.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했던 그녀는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배워 열심히 적응하려 했지만, 차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고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귀화 사실을 안 주변 한국인들은 민족의 배신자라고 질타했다. 제도 안에서 안정적인 ‘일본인’이 된 방정옥은 주부에서 인권활동가로 거듭났다. 1983년 마흔여섯 살에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가와사키 시에 거주하며 일을 돕게 된 성당에서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하는 젊은 청년들과 가와사키 시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 이주 노동자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1989년 11월, 팩스 한 장으로 노동자 450여 명을 해고한 한국스미다전기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해 일본 본사를 찾아 8개월간 농성을 벌인 한국 여성 노동자 4명을 만나면서 방정옥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들은 투쟁 끝에 마침내 회사 측으로부터 체불 임금과 퇴직금을 받아냈다. 방정옥은 그들 옆에서 그저 통역만이 아니라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요코하마로 이사한 후에는 교회 신부와 함께 지역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의료 상담과 산재 등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가난, 밀항을 거쳐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온몸으로 겪은 방정옥은 건설 현장 일용직이나 항만 노동 등에 종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통역은 물론이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어서 다쳐도 하소연할 곳도, 제대로 치료받을 곳도 없는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손발이 되어 병원을 찾아가고 회사로부터 산재 보상금을 받아냈다.

1989년 한국스미다전기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해 한국 여성 노동자 4명이
일본 본사를 찾았을 때 방정옥씨는 통역을 맡아 이들을 지원했다.

1991년에는 지역 민간 병원인 미나토마치 진료소와 연계해 일본 최초로 재일 외국인을 위한 민간 의료보험인 ‘미나토마치 건강호조회’를 만들었다. 이주 노동자들도 매월 2000엔 정도만 내면 정해진 진료소에서 안정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94년부터는 요코하마의 지역노동조합 ‘가나가와 시티유니온’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12월5일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과 삶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온 방정옥을 ‘2017년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병원, 회사, 경찰, 출입국관리국 직원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방정옥이 하염없이 흔들릴 때가 있다. 고국에서 아버지처럼 생긴 사람을 봤다는 소문을 들을 때다. 귀신에 홀린 듯 혼자 무작정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를 찾아다닌 세월이 수십 년이다. 1998년 제주도에서 거행된 4·3 50주년 위령제에도 혼자 온 방정옥은 60주년을 맞은 2008년에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인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라는 도쿄방문교류단의 일원으로 위령제에 참석했다. 당시 필자는 방문교류단의 실무자로 방씨를 처음 만났다. 다시 방정옥을 만난 것은 그해 4월21일 도쿄에서 열린 4·3 60주년 행사였다.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


그녀가 필자에게 조심스럽게 함평을 아느냐고 물었다. 전라도 함평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부터 1월까지 공비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1사단 등이 지역 주민 1164명을 학살한  곳이다. 아버지가 함평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며 눈물짓는 방씨를 보며 필자는 함평에서 인터뷰했던 피학살자 유족을 떠올렸다. 다음 날 방씨가 전화를 했다. 함평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2008년 10월 방씨와 함께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 함평으로 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 정근욱 회장은 방정옥을 따뜻하게 맞았다. 처음에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하게 함평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듣고, 희생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볼 참이었다. 정근욱 회장은 누군가가 멀리 일본에서 함평까지 아버지를 찾아올 줄 몰랐고, 방씨는 함평에서도 제주도만큼 처절한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령경 제공
2008년 10월 정근욱 회장(오른쪽)과 함평 양민학살 희생자 합동위령비를 찾은 방정옥씨.

아침나절 처음 만났을 때 서먹해하던 두 사람이 해질녘까지 함께했다. 두 사람은 소주를 사서, 온종일 함평 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학살 터를 찾아다녔다. 방씨가 술 한잔을 올리고 온 마음을 담아 절을 올리는 사이 정근욱 회장은 묵묵히 옆을 지켰다. 술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는 사이 방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평생을 바쳐온 정근욱 회장의 세월과 함평 피학살자 유족들의 고통을 나눴다. 정 회장은 타향 땅에서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치열하게 살아온 제주 4·3 피학살자 유족의 삶을 나누며, 서로 울고 웃었다.

방씨의 아버지가 함평에서 학살을 당했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하루는, 정근욱 회장에게는 함평 밖에서 찾아온 방정옥이라는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었고, 방정옥에게는 함평에서 수많은 ‘아버지’의 넋을 기리는 시간이 되었다. 함평 양민학살 희생자 합동위령비 앞에서 마지막 절을 올리고 술잔을 마주한 두 사람은 마치 순례자 같았다. 함평에서 돌아오던 날 밤, 방정옥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떠올리면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던 시간과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모습이 먼저 보였는데, 이젠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되었다며 웃었다. 전날과 달리 편히 잠을 이뤘다. 자신과 같은 피학살자 유족의 아픔을 공유하며 그간의 상처도 조금은 치유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 제주 4·3은 70주년을 맞는다. 올해도 방정옥은 4·3 위령제 방문단으로 제주도를 찾는다. 일본에는 방씨와 같은 제주 사람이 많다. 그들이 자유롭게 4·3을 ‘상기(想起)’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상기된 그 기억을 받아 안아 ‘상상(想像)’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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