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미국에서 민간인이 보유한 총기는 약 3억 정이다. 10가구 가운데 평균 4가구가 총기를 소유한다. 또한 총기 보유 민간인 가운데 3%는 1인당 평균 17정 이상 총기를 갖고 있다. 개인의 총기 소유 권리를 수정헌법 제2조에 명문화한 미국에서 각종 총기 사고가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2월14일 플로리다 주의 마저리 스톤먼 더글러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이 총기를 난사해 학생과 교직원 등 17명이 사망했다. 반복되는 참사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규제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이 나오지 않다 보니 총기 사고는 그칠 날이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총기 규제 반대의 선봉에 서온 막강한 압력단체 전미총기협회(NRA)를 확실히 해체하지 않고는 대형 총기 사건을 막을 수 없다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외형적으로는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지사나 의원들에게 “NRA를 두려워하지 말고” 총기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선거자금 감시기관인 비영리 단체 ‘책임정치센터(CRP)’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대선 때 NRA는 트럼프 후보 지지에 980만 달러,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반대에 1970만 달러를 퍼부었다. 트럼프는 NRA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총기 규제 발언이 사탕발림일 뿐이고, 오히려 대통령 위에 NRA가 군림한다고 볼 정도다.

ⓒAP Photo2월19일 미국 백악관 앞 광장에서 열린 총기 규제 요구 집회의 참가자들이 플로리다 주 고교 총격 사건 희생자를 기리며 바닥에 누운 채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회비를 꼬박꼬박 납부하는 정회원만 500만명인 NRA는 지난 한 해 수입만 4억3300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 최대의 총기 옹호 집단이자 압력단체다. 대형 총기 사고가 터질 때마다 NRA는 유감 성명을 낸다. 동시에 ‘민주당과 진보 언론이 총기 참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며 이들을 싸잡아 비난해왔다. 심지어 총기 규제 움직임을, 헌법이 보장한 총기 소지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색깔 공세를 펼친다.

1871년 창립해 수도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주에 본부를 둔 NRA가 본격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건 1968년 총기 규제안이 처음으로 의회를 통과하면서부터다. 1977년 이후에는 공화당 의원들과 연대해 총기 규제 완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선거철에는 무서운 정치 세력으로 돌변해 수천만 달러를 들여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후보들의 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이번 플로리다 참사는 불과 3~4개월 전에 대형 총기 난사 사건이 잇따라 터진 뒤여서 충격을 더했다. 지난해 11월5일 텍사스 주의 한 교회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터져 26명이 숨지고 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지난해 10월에도 라스베이거스에서 용의자 스티븐 패독이 2만2000여 군중에게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무려 59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동안의 숱한 총기 사고 가운데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2012년 12월의 샌디훅 참사다. 20세 청년이 돌연 모친을 사살한 뒤 초등학교로 난입해 교직원 6명과 어린이 20명을 살해했다. 대형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이 뜨거웠지만 의회는 물론 대통령도 NRA라는 ‘괴물’을 어쩌지 못해 번번이 실효적인 총기 규제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달라질까? 사회적 분위기는 그렇다. 반(反)NRA와 총기 규제에 우호적인 열기가 과거 어느 때보다 뜨겁다는 평가다. 유나이티드 에어, 델타 에어 등 대형 항공사, 대형 호텔 체인인 베스트웨스턴, 보험업계의 거인 메트라이프를 비롯해 수십 개 대기업들이 총기 규제 운동에 동참하는 뜻에서 NRA 회원에게 제공하던 할인 같은 혜택을 중단했다. 대기업이 동참한 ‘반NRA’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까지 그 파급력은 미지수다. 애플, 구글의 유튜브, 아마존 등 비디오 스트리밍의 거인들은 ‘NRA 홍보 비디오를 콘텐츠에서 내려달라’는 총기 규제론자들의 요구에 호응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도 애매하다. 이번 플로리다 참사 직후에는 총기 규제에 나름의 의욕을 보이는 듯했다. 우선 플로리다 총기 난사의 범인 니컬러스 크루즈가 사용한 AR-15 반자동총을 염두에 둔 듯 ‘반자동총의 구입 가능 연령을 지금의 18세에서 21세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또한 반자동총을 자동화기처럼 연속 사격이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인 ‘범프스톡’에 대한 규제 방안을 마련하라고 법무부에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런 규제의 입법화에 대해 지지 표시를 하지 않고 있다. 학교 교사들을 무장시키자는 황당한 주장으로 비웃음을 샀을 뿐이다. 왜 이럴까? 현재로서는 NRA가 연령의 상향 조정 및 범프스톡 규제에 완강하게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NRA에 맞서지 못하는 미국 의회

총기 규제의 핵심 주체인 의회도 무력하기 짝이 없다. 2015년 이후 총기 규제 법안이 무려 56건이나 발의됐지만 단 한 건도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텍사스 교회 난사 사건 직후에는 총기 구매자의 신원 조회를 강화하는 법안이 발의된 바 있다. 이 법안은 지난해 12월 하원을 어렵사리 통과했지만 상원에서는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의회가 속수무책인 것은 의원들이 NRA의 정치적 입김을 의식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지배적이다. NRA는 선거 때면 총기 문제에 관한 각 후보들의 견해를 파악한 뒤 이를 근거로 점수를 매긴다. A급에 포함된 후보들은 NRA의 적극 지원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후보들은 집중적인 낙선 목표가 되기도 한다. 공화당 의원들은 거의 A급이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거의 F급이다. 선거철이 닥치면 NRA는 이런 등급에 따라 특정 후보의 찬성 혹은 반대를 위해 500만 회원들에게 안내 우편물을 집중 발송한다. 텔레비전 광고 등에도 천문학적인 돈을 퍼붓는다. 단적인 사례로, ‘공격용 무기 금지안’에 찬성한 민주당 테드 스트릭랜드 전 오하이오 주지사는 2016년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그 이유는 NRA의 텔레비전 광고 때문이었다. NRA는 그의 낙선을 위해 150만 달러 이상의 광고비를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클레타 미첼 전 NRA 이사의 말을 인용해 “NRA의 진짜 힘은 어느 후보가 총기 소유권을 인정한 수정헌법 2조를 잘 지키는지 회원들에게 알려주는 데서 나온다”라고 전했다.

의원들은 NRA에 대해 이중적 행태를 보인다. 플로리다 주의 연방 상원의원인 마르코 루비오는 총기 난사 사건 직후 트위터를 통해 격한 분노와 충격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가 총기 규제에 적극 찬동하거나 NRA에 정면으로 맞선 적은 없다. 최근 〈뉴욕 데일리뉴스〉 보도에 따르면 루비오가 자신의 정치 경력을 통틀어 NRA에서 받은 후원금이 무려 330만 달러에 달한다. 루비오는 샌디훅 총기 난사 이후 상정된 ‘공격용 무기 금지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외에도 론 존슨, 테드 크루즈, 팻 투미, 로브 포트먼 등 중량급 공화당 상원의원 15명이 NRA의 ‘최대 기부금 수혜자’ 명단에 올라 있다.

책임정치센터에 따르면, NRA가 선거자금을 가장 많이 지원하는 상·하원 의원들을 조사한 결과 1위부터 81위까지 전부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총기 규제의 주체라 할 의원들이 이처럼 NRA 영향권 안에 있는 한 현재의 대형 총기 사고는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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