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인 스키는 자연에서 비롯됐다. 험준한 산맥을 스키로 오가던 일상이 스포츠로 변했다. ‘알파인(alpine·알프스의)’이라는 이름은 그 발상지를 드러낸다.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휩쓸어온 국가들 역시 오스트리아·스위스 등 알프스 지역에 있다. 한국에서는 알프스 산맥 같은 입지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산을 깎고 나무를 베어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가리왕산이다. 공사비를 2000억원 이상 들인 이 알파인 스키장은 평창 동계패럴림픽이 끝나면 철거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천문학적 비용 문제 때문에 가리왕산 복원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가리왕산은 고대 맥국(貊國)의 왕 이름을 땄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부터 봉산(封山·벌목을 금지한 산)으로 보호돼 500년 가까이 천연 원시림으로 남았다. 1300~ 1500m로 해발고가 다양해 주목·인가목·등칡 등 여러 식물종이 활발히 생육하는 곳이다.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희귀 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이라 연구자들이 즐겨 찾는 산이기도 했다. 알파인 스키장 첫 삽을 뜨기 전인 2013년 6월까지 산림보호법상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산림의 식물 유전자 또는 산림생태계 보전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구역)으로 지정해둔 이유다.

ⓒ연합뉴스눈 덮인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얄궂게도 가리왕산이 알파인 스키 경기장으로 낙점된 까닭은, 이곳이 식물의 보고가 된 비결과 같았다. 국내에 드문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동계올림픽에 쓸 알파인 스키 경기장의 규격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스키연맹(FIS)이 정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알파인 스키 활강 종목을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은 슬로프 연장 길이 3000m 이상, 표고차(출발점과 결승점의 고도 차이) 800m 이상, 평균 경사도 17° 이상인 산지에 한한다. 눈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해가 들지 않는 북향 경사면도 필요했다. 그 결과 가리왕산만 입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게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평창조직위)의 설명이었다. 평창 가까이에서는 그랬다.

강원도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대안이 없지는 않았다. 19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 전북 무주에서 적극적으로 나왔다. 전북도의회는 2014년 말 “알파인 스키 종목에 한해 무주리조트 활강경기장을 이용하자”라고 공식 제안했다. 가리왕산에 2000억원짜리 새 경기장을 짓는 대신 무주리조트에 120억원가량을 들여 국제스키연맹 기준을 맞추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 밖에 1998년 동계올림픽을 치러 시설이 완비된 일본의 나가노도 대안으로 꼽혔다. 산지가 많은 북한 역시 후보군이었다. 그러나 평창조직위는 일관되게 분산 개최를 거절했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분산 개최는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김진선 전 평창조직위 위원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IOC 측에서 실사를 와서 이동거리가 너무 멀다고 지적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후임 조양호 전 위원장 역시 ‘국제적 신뢰 하락’을 이유로 분산 개최 논의를 거부했다.

“경기장보다 생태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애초 분산 개최론의 진원지는 IOC였다. 2014년 말 IOC는 ‘올림픽 어젠다 2020’을 발표했다. 한 국가·한 도시에서만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골자였다. 재정 부담과 환경 파괴를 이유로 올림픽 개최를 포기하는 국가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IOC가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이 개혁안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적용할 수 있었다. 2015년 평창 슬라이딩센터 공사가 늦어지자 IOC는 조직위에 일본 나가노 썰매 경기장을 이용하도록 권고했다. 가리왕산 현장에서도 IOC 측은 ‘환경이 먼저’라는 견해를 보였다.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설계자인 베른하르트 루시에 대해, 2012년부터 현장답사에 수차례 동행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보호해야 할 식생에 대해 설명하자 대부분 수용해서 코스를 짰다. 그 역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기장보다 생태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녹색연합 제공2016년 10월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의 스키장 건설 공사 현장.
환경단체에서는 “가리왕산에 알파인 경기장을 지은 일이야말로 국제적 기준에 맞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 커서다. 국내 산지는 표고차나 경사도처럼 경기에 필요한 최소 조건은 갖출 수 있으나 적설량이 모자란다. 눈이 많이 오는 유럽과 일본은 더 적은 돈으로 환경을 덜 파괴하면서도 스키장을 새로 만들 수 있다.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 경기장을 짓는 과정에서 훼손된 나무는 적게는 5만8000그루, 많게는 12만 그루라고 알려져 있다.

경기장을 없애고 가리왕산을 복원하는 데에는 악조건 하나가 더 추가된다. 한국은 이 정도 고도에서 식생을 복원해본 경험이 없다. 산지 복원은 지형 복원과 식생 복원으로 나뉜다. 비바람이나 산사태에 따라 무너진 곳을 되돌리는 작업이 지형 복원이다. 산사태를 맞은 지리산 일출봉, 덕유산 향적봉 등이 이렇게 복원됐다. 그러나 식생 복원은 훨씬 정교한 작업이다. 정확히 어떤 고도와 기후에서 어떤 종의 식물이 자라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파악할 수 있더라도 실행이 문제다. 고산 지역 식물을 채취·이식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고, 성공 여부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역피라미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도가 높을수록 식생 복원은 까다로워진다. 평지 복원이 맹장염 수술이라면 1500m 가리왕산 복원은 4기 암 수술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수술비’ 앞에 정부 주체들은 동상이몽이다. 지난 1월26일 강원도는 복원 비용을 477억원(국비 327억원, 도비 150억원)으로 책정한 ‘가리왕산 생태 복원 기본계획’을 산림청에 제출했다. 가리왕산 복원의 첫 관문이다. 그러나 산림청은 ‘보류’ 결정을 내렸다. 산림 구역별 차별화, 해빙기 대비책 마련, 지역 특색 강화를 주문했다. 가장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이 비용이었다. 산림청 담당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전문가들은 복원에 시설비(2034억원)의 절반쯤 든다고 판단했다. (강원도청이) 그 부분도 보완하지 않을까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1000억원 이상 복원 비용이 든다는 이야기다. 강원도는 국비가 지원되지 않는 이상 어렵다는 입장이다. 강원도청 측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끊임없이 국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부정적이다. 예산을 덜 들이면서 복원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복원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 2월26일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강원도민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2021년 동계아시안게임 남북 공동 개최를 위해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존치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이 경우 재정 부담은 더 심해질 수 있다. 코스가 가파른 알파인 스키장은 상업 스키장으로 쓰기에 부적합하다. 수익 없이 관리비와 인건비만 나가는 시설이 될 여지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안전이다. 급경사로 깎인 데다 나무도 대거 잘렸기에 산사태 위험성이 크다. 환경단체들은 “2011년 17명이 죽은 우면산 산사태보다 지금 가리왕산 상황이 훨씬 위험하다”라고 주장했다. 어떤 결정이든 울며 겨자 먹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평창조직위가 발급한 ‘흑자 올림픽’ 계산서에는 가리왕산 항목이 누락됐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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