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는 3대가 모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지만, 어쩌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세대 전쟁으로 불리는 이 공방은 청년 세대의 선공으로 시작된다. 즉 노인들이 부동산 가격을 높여서 청년을 주거 난민으로 만들었고, 조세 체계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은퇴할 나이가 넘도록 일자리를 차고 앉아 청년들을 실업에 빠트릴 뿐 아니라, 노인에게 지급되는 연금도 청년들이 땀 흘려 일한 덕에 마련된 것이다. 묵묵히 조국 근대화를 위해 청춘을 바쳐 일했던 노인들은 이런 공격을 부당하게 느낀다. 이 전쟁은, ‘모든 것을 차지한 승자/노년층’ 대(對) ‘모든 것을 빼앗긴 패자/청년층’이라는 지형에서 치러진다.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헬조선’ 담론 역시 이런 구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세대 게임〉 전상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전상진의 〈세대 게임〉(문학과지성사, 2018)은 세대 전쟁의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말하려는 핵심은 ‘세대 전쟁’이라는 험악한 용어를 물리친 책 제목에 오롯이 명시되어 있다. 모든 게임에는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경기자)가 있듯이, 세대 전쟁의 실상은 ‘세대라는 카드’를 이용한 플레이어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다. 지은이가 ‘세대전쟁론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세대 카드 게임’의 경기자들은 이 게임을 통해 두 가지 전략적 이점을 얻고자 한다. 하나는 비난할 세대를 내세워 문제 사안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다른 하나는 특정 세대를 자신의 지지자로 동원하는 것이다. 세대 게임은 어르신을 편드는 보수나 젊은 층에 우호적인 진보 할 것 없이 손쉽게 애용하는 정치 전략이다.

세대전쟁론자들이 선동하는 세대 전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되기 마땅한 ‘승자/노년층’이라는 단일한 계층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최악의 노인 빈곤 국가로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이 49.6%에 달한다. 아울러 ‘패자/청년층’마저 동질하지 않다는 것은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로 나뉜 세심한 분류가 웅변해준다. 설 연휴 화제로 세대가 나오면 반드시 이 말을 기억하자. “세대 프레임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세대의 틀로 정의하고, 특정 세대에게 책임을 묻고, 그 세대에게 벌을 가하거나 그들로 인해 손해를 입은 다른 세대에게 보상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그 문제의 세대적이지 않은 다른 측면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설이라고 해서 모두 귀향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고양이와 내처 지낼 수 있는 것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누군가가 당신이라면 이번 설 연휴에 반드시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은 애비게일 터커의 〈거실의 사자〉(마티, 2018)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고양이에 관해서는 온갖 책이 쏟아져 나왔으나, 과학 칼럼니스트가 쓴 이 책은 좀 특별나다. 고양이는 이 책에서 더는 귀여운 반려 동물이 아니라, 육식 포유동물 가운데서 가장 최상위에 좌정해 있는 포식자라는 위상을 얻는다.

사자·호랑이·표범·퓨마·치타·고양이 같은 고양잇과(Felidae) 동물 가운데 고양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양잇과 동물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몸집이 작고 상대적으로 연약한 고양이만 번창했다. 전 세계 고양이 개체 수는 6억~10억 마리로 추산되고 있으며, 인간의 무릎이나 거실의 소파를 놓고 개와 경쟁을 벌인 끝에 무려 세 배나 더 많은 우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1억 마리에 달하는 애완고양이가 있다. 문제는 사자·호랑이 같은 고양잇과의 최강자는 자신의 주식(主食)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고양이는 살아 있는 거의 모든 생물체를 공격한다. 고양이가 들어간 섬마다 생태계가 교란되지 않은 섬이 없는데,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커다란 섬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지영 그림

고양이가 번성한 비결

고양이가 번성한 비밀은 맹렬한 생식력에 있지 않다. 이들은 고기를 놓고 사자나 호랑이와 경쟁하는 게 무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자진해서 인간의 거실을 정복하는 전략을 썼다.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사람이 먹는 고기를 제 몫인 양 나누어 먹기 위해 고양이는 인간의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자신을 공들여 진화시켰다. 고양이는 인간의 갓난아기와 흡사하게 얼굴과 울음소리를 닮아갔고 마침내 진화는 성공했다. 한국에서 고양이는 오랫동안 상서롭지 못한 요물 취급을 받았으나, 최근 약 10년 사이에 애묘는 대세가 되었다. 제목과 전혀 딴판인 양선규의 중편소설 〈고양이 키우기〉(고려원, 1987)를 생각하면 가히 격세지감이다.

설 연휴 며칠만이라도 잊고 싶은 이름은 단연 트럼프와 홍준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말꾼 트럼프는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하다. 자기 존중감으로 번역될 수 있는 나르시시즘의 긍정적인 면모는 자기 성찰과 상호 존중이다. 반면 열등감과 자기 회의에서 출발한 데다가 실패에 대한 방어기제인 부정적 나르시시즘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이와 같은 언행을 맴돈다. 자기 존중감을 외부에서 찾는 이들은 타인의 인정을 절실히 갈구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중을 사로잡는 뛰어난 유혹자이면서, 놀라운 성과와 능력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기도 한다. 하지만 내면이 텅 비어 있는 이들은 끝내 타인과 감정을 나눌 수 없으며, 주위의 비판에 과도한 분노·고집·폭력으로 반응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나르시시스트 리더〉(와이즈베리, 2018)에서 왜 트럼프·푸틴·에도르안·박근혜(86쪽에 나온다) 같은 나르시시즘 성향을 가진 지도자가 대중의 인기를 얻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지 분석했다. “무엇이 우리와 ‘나르시시스트’들을 엮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이 바로 그 답이다. 주위를 압도하는 자기도취적 인물은 특히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해 동경만 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발휘하는 나르시시즘적 위대함과의 동일시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의 광휘가 자신에게까지 비추는 것을 느끼며 자아 존중감이 강화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지체 높은 사람의 광증은 지체 낮은 사람의 그것보다 한층 불길하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바, 지은이가 이 책을 쓴 이유도 거기 있다. 국가 지도자의 나르시시즘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트럼프의 경우 한 개인의 나르시시즘은 양태적 변용을 거쳐 미국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21세기 세계 문명 질서마저 파괴한다. 트럼프의 나르시시즘과 그가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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