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후 수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어. 식민지 조선보다야 먹고살 만한 일자리가 더 있었을 테니까.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더 많은 조선인이 일본 전역의 탄광과 공장에서 일하게 됐고, 해방 무렵 일본에 터 잡고 살아가던 조선인은 무려 200만명에 이르게 돼. 해방 후 상당수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도 많았어. 이를테면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이 귀국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에 제한을 두었다. 현금 1000엔, 물건으로는 약 110㎏이 전부였지. 1000엔이라고 해봐야 쌀 한 가마니도 못 되는 것이었으니 숫제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국하라는 것과 진배없었어. 결국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는다. 이른바 ‘재일동포’들이지.

고국에 돌아가지는 못하게 됐지만 재일동포들은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인의 특징 하나를 공유하고 있었지. 바로 교육열이야. 해방 직후 재일동포들이 난감해한 것은 2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문제였어.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 우리말과 글에 익숙할 수 없었으니까. 조선인연맹 사무실이나 폐쇄된 공장 등을 빌려 이뤄지던 ‘국어강습회’가 ‘조선학교’로 확대되어 일본 전국에 약 500여 곳, 학생 수는 6만을 헤아리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뤘지. 그런데 재일동포들의 조직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다고 판단한 미군정과 일본 당국은 조선학교들을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해치는 공안의 문제로 바라봐. 미군정과 일본 당국은 1948년 1월24일, 일본 교육실정법 위반을 들어 조선학교 폐쇄와 학생들의 일본학교 편입을 명령한단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1948년 미군정과 일본 당국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리자
재일동포들은 ‘조선학교를 지켜라’고 부르짖으며 시위에 나섰다.

“해방된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교육을 하겠다는데 왜 금지한단 말인가.” 재일동포들의 울분은 끓어올랐어. 재일동포들이 밀집해 살던 한신 지역(오사카와 고베 일대)에서는 4·24 한신 교육투쟁이라 불리는 거대한 항쟁이 벌어졌어. 수천명의 재일동포 시위대와 일본 공산당원들이 오사카 성 주변 곳곳에서 봉홧불을 피우며 경찰과 맞섰고 오사카 부청사로 돌격하지만 공권력에 막혀 무산되고 말았지. 항의시위 과정에서 두 명의 재일동포가 죽었어. 그중 오사카에서 경찰의 총에 뒷머리를 맞아 죽은 김태일은 불과 열여섯 살이었지.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곱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 그러던 그가 “조선학교를 지켜라!”고 부르짖으면서 시위의 선봉에 섰다가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열여섯 살 공장 직공이 지켜내려고 했던 ‘조선 교육’.

1949년 전면적인 조선학교 폐쇄령이 내려지면서 거의 모든 조선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이후 재일동포들의 노력으로 다시 명맥을 이어 나갔어. 일본 당국은 당연히 조선학교를 정식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았고 재정 지원은커녕 정식 학력조차 인정하지 않았지. 거기에 조국의 분단은 재일동포 사회에도 들이닥쳤어. 재일동포들은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남한 쪽에 선 거류민단으로 나뉘게 돼.

조선학교는 조총련 쪽의 지원을 받았어. 정작 조선학교에는 조총련 계열의 재일동포들만 들어온 건 아니었어.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2세들도 조선학교를 찾았어.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이 아니면 우리말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야(민단 쪽의 교육기관은 거의 없었어).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외면했단다. 조선학교 자체가 재일동포들의 열렬한 투쟁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좌익에 기울었다는 이유로,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계열이라는 이유로 험악하게 바라보았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 조선학교 문을 닫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어. 한국의 재일동포 정책이 ‘기민정책(棄民政策)’, 즉 사람들을 버리고 내팽개치는 것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알다시피 아빠는 북한 세습 정권을 무척 싫어하지만 한때 북한이 재일동포들에게 성의를 다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단다. 한국전쟁 이후 폭격으로 인해 ‘석기시대로 돌아간’ 나라를 재건하는 와중에도 북한은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에 돈을 주고, 책을 보내고, 민족 교육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왔어. 누가 뭐래도 가장 어려운 시절 자신들을 도왔던 사람들과 그 나라에 친근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었겠니. 조총련을 싫어하고 공산주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재일동포라도 자식들로 하여금 우리말을 잊지 않게 하려고 조선학교를 보내야 했던 시절, 일본과 국교를 맺고 명색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속 좁음은 길이길이 부끄러움으로 남을 것 같구나.

정대세가 인공기 앞에서 눈물 흘린 이유

요즘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축구 선수 정대세는 초·중·고교 과정을 모두 조선학교에서 마쳤어. 그 아버지는 한국 국적이었고 정대세도 그랬지만 조선학교를 거친 정대세는 북한에 대해서도 애정을 가지게 됐고, 일본 팀한테 완파당하는 북한 축구팀을 보고 북한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 하지. 하지만 한국 국적자가 북한 선수로 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분단국가 재외 국민의 특수성을 열렬히 호소하고서야 북한 대표로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지. 경기 전 북한 국가(國歌)를 들으며 정대세는 펑펑 울었다. 아빠는 그 눈물이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在日:일본인들이 재일동포를 부르는 말)로서 겪었던 차별의 기억과 그 참담함 속에서도 자존을 잃지 않게 해준 조선학교와 그를 도와줬던 대상(꼭 김일성 부자라기보다는)에 대한 감회가 폭발한 것이라고 봤어. 수십 년 동안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은 치마저고리였는데 전철 안에서 칼에 찢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지.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포기하지 않았어. 아마 정대세에게도 분명히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거다. 그에게 인공기 앞에서 눈물 흘린 죄를 물을 수 있을까.

ⓒREUTERS조선학교 출신 한국 국적의 축구 선수 정대세는 북한 대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출전했다.

언젠가 너랑 함께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에서 재일동포 2세 출신의 한 조선학교 선생님은 재일동포 3세나 4세쯤 돼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대에 맞는 민족 교육을 하고자 또 하나의 조국 한국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처럼 조선학교도 이제는 북한 일변도의 교육에서 벗어난 민족 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어. 아직 조선학교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우리는 예전의 한국 정부처럼 그들을 외면해야 할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그들이 익혀온 시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과 상식을 경험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돕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몽당연필〉이라는 조선학교 돕기 모임 회원이 되려고 해. 조선학교는 소중한 존재거든.

무슨 ‘민족 교육’을 해서만은 아니야. 한 집단 내에서 절대적으로 소수인 또 다른 집단이 불굴의 의지로 지켜온 권리, 터무니없는 차별과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 원하는 것을 배우고 교육할 권리를 70년 동안 지켜온 사람들의 집념과 의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보배롭기 때문이지. 열여섯 살 노동자 가장으로 조선어 교육을 위해 시위하다 총을 맞은 김태일부터 ‘인민 루니’ 정대세에 이르는 그 역사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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