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민족학박물관 제공김준근, 〈얼음 위에 낚시질하는 모양〉 오스트리아 빈 민족학박물관 소장.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림 속 두 사람의 옷차림이며 방한구 따위는 오늘날과 그 모습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느라 양반다리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한 군데를 응시하는지는 알 만하다. 화제(畵題)를 읽으며 다시 빙긋 웃는다. ‘얼음 위에 낚시질하는 모양.’

한 세기 전 얼음낚시 모습이다. 이렇게 얼음 구멍을 내고 하는 낚시를 ‘얼음치기’라고 한다. 어른 남성 둘이 다리 짧은 평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 얼음치기에 온통 집중하고 있다. 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평상 다리에 날을 달면 앉은뱅이 썰매 노릇도 한다. 무척 추울 텐데 달랑 도롱이 하나만 바람막이로 둘렀다. 머리는 두건으로 싸맸다. 얼음판에 엉덩이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 평상 위에 앉기는 했는데, 깔개까지 마련할 형편은 못 되는 모양이다. 저렇게 붙어 앉은 둘은 얼굴도 닮았다. 혹시 부자지간은 아닐까. 수염 기른 이의 장대낚시에든, 젊은이의 손낚시에든 부디 얼른 물고기가 걸렸으면 좋겠다. 이들은 한 푼이라도 벌러 나왔을 테니 말이다.

공연한 상상, 허튼소리만은 아니다. 내수면의 얼음낚시는 진작부터 서민들의 요긴한 생업이었다. 그림과 함께 읽을 만한 기록이 있다. 1883년 조선에 온 미국인 퍼시벌 로런스 로웰(1855~1916)의 한강 얼음낚시 기록이 전해온다. 이 땅을 맨 처음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 불렀고, 조선 외교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사절단을 수행한 인물이다. 로웰은 자신의 책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Chosön, The land of morning calm)〉(조경철 옮김, 예담출판사)에서 ‘겨울의 한강 풍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있어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빙판 위에서는 한 무리의 어부들이 얼음 구멍을 뚫기 위한 도구를 가지고, 썰매 하나씩을 끌면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썰매 위에 앉아 고기가 물기를 기다렸다.”

당시 서울 사람들이 매일 먹는 겨울 생선은 이들 낚시꾼이 공급했다. 로웰에 따르면 강둑에 모여 사는 주민은 겨울이면 얼음낚시꾼 또는 나무꾼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강은 1월과 2월 두 달은 꽁꽁 얼어붙어 일반적인 어로가 불가능했다. 땅마저 3월이나 되어야 녹았다.

낚시의 실제를 살펴보자. 젊은이가 깔고 앉은 낚싯대는 ‘가리손대’일 것이다. 가리손대는 두 갈래가 진 낚싯대를 뜻하는 옛말이다. 바늘은 추를 가운데 두고 낚싯바늘 셋을 둘러 엮은 ‘삼봉(三峰)’일 것이다. 합성섬유가 없던 시절에 가장 믿을 만한 낚싯줄은 명주실이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한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강에서는 주로 무엇을 잡았을까? 로웰은 이렇게 썼다. “낚시꾼들이 주로 잡는 물고기는 잉어다. 그들은 물속에 그물을 치고, 얼음 위에다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여기에 미끼 없는 낚시를 드리운다.” 그런 다음 그물 쪽으로 “사람이 낼 수 있는 한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고기 몰이를 시작한다. 놀라서 오락가락하던 잉어는 그물에 막혀 허둥대다 미끼도 없는 훌치기에 걸린다. 로웰의 기록을 마저 읽자. “낚시는 각이 진 세 개의 갈고리로 되어 있는데 미끼 없이 맨낚시를 하는 것은 겨울철뿐이고, 여름철에는 미끼를 써서 고기를 낚는다.”

로웰의 기록은 10여 년 뒤 통감부가 주도해 발간한 수산 보고서인 〈한국수산지(韓國水産志)〉 속 잉어 얼음낚시 조사 보고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 굳이 〈한국수산지〉를 겹쳐 인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기록의 힘은 새삼스럽다. 김준근의 그림과 로웰의 문자가 서로를 되비춘다. 소담한 풍경이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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