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노래를 잘했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노래할 때만은 세상이 자기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안의 살림 밑천이었던 소를 팔아 마련한 돈을 남자에게 쥐여주며 어머니는 말했다. 갑순아, 이 돈 가지고 서울 가서 네 이름으로 노래 내서 꼭 출세해라. 충남 논산 출신인 김갑순은 그렇게 서울로 올라왔고, 밤무대 허드렛일 십수 년 끝에 ‘명사십리’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 주의 신인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 무대에도 올라갔으니 이제 성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우일 그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막노동자로, 그도 안 되면 노숙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당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 김형곤이 “나훈아 모창 가수를 하면 성공하겠다”라고 건넨 조언에, 남자는 김갑순이라는 이름 대신 너훈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참 희한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살겠다고 나섰을 땐 다들 등을 돌리던 이들이,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고 저기 저 빛나는 별을 흉내 내자 열광하기 시작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훈아를 모실 여력이 안 됐던 밤무대가 남자에게 문을 열어줬다. 그는 1992년 SBS 개국 기념으로 열린 나훈아 모창 대회에서 나훈아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나운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평생의 동지 박승창과 함께였다.

말씨가 입에 배어 있어야 한다며 한사코 제 입말 대신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그였다. 조금이라도 ‘보스’(나훈아의 모창 가수들이 존경의 의미로 나훈아에게 붙인 별명)를 닮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지긋지긋했다. 밤무대 MC들은 관객을 웃기기 위해 이미테이션 가수들을 놀려댔다. “너훈아씨 어머니는 물 떠놓고 기도하신다면서요? ‘진짜 나훈아야 후딱 뒈져라. 그래야 우리 너훈아가 뜬다.’” 누군들 남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평생을 살고 싶었을까. 남자는 말 못할 고통 속에 굴욕을 참다가, 제 평생 친구였던 밤무대 MC 윤찬과 의절하기도 했다. 그가 자꾸 자신을 ‘짝퉁 나훈아’라고 소개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였다.

나훈아도 무대도 늘 처절한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자신을 찾는 곳이라면 얼굴을 비췄다. 언젠가 제 본명으로 2집을 내서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남자는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불러 타고 다니며 행사를 뛰었다. 아들의 중국 유학길에 아내가 동행하면서 홀로 남은 남자는 더더욱 쉴 수가 없었다. ‘짝퉁 나훈아’라는 이야기를 듣는 게 자식 앞에서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는 쉬지 않았다. 진짜 나훈아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이 자신을 보며 아쉬움을 달랜다는 사실을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죽겠노라며 병을 숨기고…

남자를 멈춰 세운 건 간암이었다. 2012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8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은 남자는,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면 편한 마음으로 노래하다가 무대 위에서 죽겠노라 말하며 병을 숨겼다. 남자는 태진아의 모창 가수 태쥐나로 데뷔한 친구 윤찬과 화해하고, 6개월마다 항암 치료를 받아가며 무대에 올랐다. 세상을 떠나기 20일쯤 전에는 한 장애인 시설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복수로 부른 배와 주렁주렁 꽂힌 파이프를 숨긴 채 행사에 참여했다.

남자는 고향인 논산시 양촌면에 묻혔다. 그의 동생과 동료 모창 가수들은 뜻을 모아 그의 무덤가에 남자가 본명인 김갑순으로 발표한 유일한 앨범의 타이틀곡 ‘명사십리’의 노래비를 세워주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만 만나보자 불러봐도 대답할 그 날짜가 너무 막연해 물새야 너도 우느냐.” 평생 자기 이름으로 세상의 환호를 받길 바랐지만, 일평생 나훈아의 팬들을 달래주며 살아야 했던 남자는 죽고 난 뒤에야 제 본명과 제 노래 옆에서 쉴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1월12일, 나훈아의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로 활동하던 남자 김갑순이 5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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