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학교는 방학을, 학원가는 신학기를 맞았다. 일찌감치 재수를 결정한 입시생을 비롯해 입학과 개학을 앞둔 재학생들까지 몰려들어 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번 입시에서 실패해본 재수생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재학생들은 지금까지의 결과를 만회할 기회이니 절실하다.

이들 중 일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대부분의 과목을 선행학습해왔다. 지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어휘를 학습하는 영어 과목을 제외하곤 처음 배우는 내용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기 중에 잡아놓은 면학 태도가 흐트러질까 봐 비용을 지불하고 오전부터 수업하는 학원에 온다. 그중에는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활용해 법의학, 교육학, 인공지능 등 추상적인 전공 분야를 설정하고 제 나름으로 준비를 해온 학생들도 있다. 이들이 자습 시간에 고학년용 문제집을 거침없이 풀거나 진로용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주변 아이들은 풀이 죽는다. “나만 준비를 안 해놓은 것 같다.” “나도 공부를 할 만큼 해왔고 성적도 잘 받는 편이었는데, 여기 와서 많이 깨지고 겸손해졌다.”

ⓒ김보경 그림

이 아이들은 학습량과 평가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지역 혹은 전국 단위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다. 그런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사교육에 목을 맨다. 그냥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쟤보다 잘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쏟은 노력의 양과 질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함께 요구하는 경쟁이다. 

충분히 노력해도 막막한 아이들

오로지 자기 성적이 전년도 입시 결과 커트라인 안에 들어갔을 때 혹은 자기 백분위 앞에 있는 급우들이 없을 때에만 이 레이스는 끝날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일 때, 그것을 견뎌내는 일은 막막하다.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지표가 백분위의 숫자다. 신학기 상담 때 자주 하는 단골 질문은 “몇 등 안에 들어야 안전할까요?”이다.

아이들이 수학 한 과목에 선행학습 학원, 정규 학교 수업, 심화 단과 학원, 개인 과외, 방학 특강까지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꿈과 끼를 발현하려면 학벌도 필요한 세상이라고 아이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10여 개 교과목 중에서 좋아하는 과목이 하나도 없고, 진로 계획 또한 세워보지 않았을지라도 상승 욕구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의욕이 된다. 상담할 때 학원에 온 이유를 물어보면 아이들은 ‘사회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갖고 싶은 욕구’ ‘진로를 탐색할 때 걸림돌이 되지 않을 학벌’ ‘유명한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욕망’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렇기에 휴식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자책하며, 움직이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괴롭다. 충분히 애써왔음에도 더 우위에 서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스스로를 결함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좋아하면 잘하게 되고, 잘하면 좋아하게 되는 학습의 선순환을 생각해본다. 또래 집단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학생은 공부에 대한 자신감과 효능감을 얻을 것이다. 이들에게 경쟁에 몰두하는 일은 불안을 이겨내고 자신을 신뢰하게 될 기회이자 생활 전반의 활력을 주는 경험일 수 있다. 하지만 우위에 선 이 소수의 아이들을 포함해 ‘모든’ 아이를 생각해본다.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만 보여 막막한 아이들, 열심히 애썼는데 그 결과를 칭찬해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집단에서 존재감이 지워져버린 아이들 모두에게 지금 이 겨울방학은 훗날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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