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어느 자리에서건 눈에 잘 띈다. 훌쩍 큰 키에 늘 선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다. 10년 가까운 대변인·부대변인 시절, 그가 누군가와 얼굴을 붉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일단 상임위에 나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재선되면서 전투력도 더 강해진 듯하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을 파헤치던 2016년에 그랬다. 부산대병원의 전공의 폭행 사건을 폭로하던 2017년 국감 때는 더 강해졌다. 굳은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문제점을 짚어나간다.

유은혜 의원의 의정 철학은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입법으로 보완한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이 세상을 뒤흔들자 ‘블랙리스트 방지법’을 만들어 통과시켰고, 전공의 폭행 사건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해 ‘전공의 법’을 준비 중이다. ‘김근태 계보’로 정치권에 들어와 차기 내각의 유력 후보로까지 성장한 유 의원의 스토리를 키워드 중심으로 풀어본다.

ⓒ시사IN 조남진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입법으로 보완한다는 의정 철학을 가지고 있다. ‘블랙리스트 방지법’을 만들어 통과시켰고 ‘전공의 법’을 준비 중이다.
교문위 지킴이

SOC(도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관심이 많은 지방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토교통위원회를 선호하듯, 수도권 의원들에게는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가 인기 상임위다. 지역마다 학교와 관련된 현안이 많고 학부모들의 관심도 크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은혜 의원은 6년 내리 교문위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두 가지 비전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의 지역구가 속한 경기도 고양시를 교육·문화·예술이 특화된 ‘자족 도시’로 만들고자 함이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베드타운에 그쳤던 일산이 K컬처밸리가 들어서고 MBC, SBS, EBS 방송센터가 옮겨오는 등 문화예술 도시로서 인프라를 갖춰가고 있다. 일산을 명실상부한 문화예술 자족 도시로 만드는 게 유 의원의 바람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 차원의 비전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어느 정도 정착됐다고 생각한 민주주의가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급속도로 퇴행하는 걸 경험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더 성숙해져야 함을 절감했다고 한다. 교육을 통해 어려서부터 민주주의를 체화하고, 문화예술을 통해 민주주의가 일상에 녹아드는 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퇴행 불가의 단계로 들어서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의 개헌 논의 과정에서 우리 헌법에 ‘문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담아 이른바 ‘문화 헌법’을 만드는 데 힘쓸 생각이다.



ⓒ연합뉴스2016년 9월28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는 유은혜 의원(오른쪽 발언자).
국정 농단 파악에 앞장서다

유 의원에게 2016년 국정감사는 평생 잊지 못할 역사적 시간으로 남았다. 유례없는 여당 대표의 국회 보이콧이 제 발목을 잡았다. 친박 핵심인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방어해보겠다며 난데없이 국감 보이콧을 선언하고 단식에 돌입하면서 여당 의원 없이 국감이 진행됐다. 종전대로라면 의원 1인당 질의 시간이 길어야 7분이라 질문 몇 마디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태반인데, 야당만 참석하다 보니 한 의원당 15분씩 여러 번 질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정부와 증인들을 상대로 물고 늘어지다 보니 새로운 의혹들이 튀어나왔다. 야당 의원 각자의 관심사에 대한 답변들이 모이면서 하나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학사 비리만 해도 전재수 의원이 이화여대 학칙 개정에 대한 질의를 하다 소급 적용된 사례가 드러난 경우다. 그때가 정유라 입학 시점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정유라 입학 비리부터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블랙리스트 의혹까지, 2015년 국감 때 이미 문제가 제기됐지만 여당 의원들에게 막혀 묻히곤 했던 사안들이 일사천리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의 설립 승인이 하루 만에 난 과정도 그 와중에 밝혀졌다.

이처럼 교문위가 국정 농단의 실체를 밝히는 데 선두 역할을 하다 보니 이후 꾸려진 당 차원의 TF에도 도종환·안민석·손혜원 등 교문위원이 들어가 맹활약을 했다. 당시 원내대표가 우상호 의원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교문위가 정말 크게 기여했다고 칭찬한다. 유 의원은 “2016년 교문위를 처음 경험한 초선 의원들은 그때 경험이 워낙 짜릿해서 2017년 국감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당시 민주당 간사였던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 장관으로 가면서 지금은 유 의원이 교문위 간사를 맡고 있다.

ⓒ연합뉴스1월7일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블랙리스트 피해 문화예술인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블랙리스트 방지법 &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

최근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서 책임 있는 사람들은 벌 받게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아가 문화예술인들이 제대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지원을 확대해 나가겠다.” 선언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으나 관련 법안은 이미 마련된 상태다. 유은혜 의원이 대표 발의해 지난해 11월 국회를 통과한 ‘블랙리스트 방지법’이 그것이다.

기존 ‘문화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다 들어가 있는 듯한데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빠져 있다. 이에 유 의원은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추가한 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지난해 11월9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유 의원은 “상식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하는데도 야당에서 반대표가 많이 나와 놀랐다. 블랙리스트 방지가 실제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한지 현장에 있는 분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후속법을 마련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유은혜의원실 제공2011년 1월 국립 4·19민주묘지를 방문한 고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왼쪽)과 유은혜 의원.
문재인 대통령과 유은혜 의원의 ‘케미’를 보여주는 또 다른 법안이 있다. 블랙리스트 방지법과 같은 날 국회를 통과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유 의원이 최성 고양시장과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원을 받아 추진한 것인데, 매년 8월14일(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날이 1991년 8월14일이다)을 ‘기림의 날’로 정하고, 생전에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최저 생활을 지원하며 사후에는 마땅한 예우를 갖추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 법이 통과됨에 따라 오는 8월14일이 첫 기림일이 될 예정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 기림일이 의미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유 의원은 관련 상임위에서 준비위를 꾸릴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박근혜 정부가 맺은 한·일 위안부 협정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해법이 나왔는데, 큰 줄기가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제공한 10억 엔도 우리 예산으로 충당해 할머니들이 떳떳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이를 위한 법적 근거는 아무래도 유 의원이 주도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이 될 듯싶다.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을 찾다

문재인 정부 조각 당시 유은혜 의원은 여러 자리에서 하마평이 나왔다. 여성인 데다, 문재인 대표 시절 첫 번째 인사가 유은혜 의원을 대변인에 임명한 것이고, 인수위 격인 국정기획위원회의 사회분과위원으로도 활약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 사이에서는 “유 의원은 문 대통령이 꼭 쓰고 싶어 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임기 중에 한 번은 발탁될 것이다”라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유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한 것은 2015년 2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대변인을 맡으면서부터다. 당시 문 대표는 비서실장에 범친노로 분류되던 김현미 의원을, 대변인에 김근태(GT)계로 불리는 유은혜 의원을 임명했다. 두 의원의 지역구가 붙어 있어서 “문 대표가 일산 여성들을 좋아하나 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그보다 시간을 거슬러 유 의원과 문재인 대통령 사이에는 색다른 인연이 있다. 은행원 출신인 유 의원의 부친이 1992년 부산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중소기업의 감사역을 새로 맡아 부산에 내려갔는데 아침 일찍 회사를 둘러보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 장례를 치른 후 유 의원은 아버지의 죽음이 산재에 해당한다는 걸 깨달았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현장에 살다시피 했는데 정작 아버지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산재 신청을 준비하던 중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간 곳이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이다. 노동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기에 찾아갔고 문 변호사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결국 승소했다. 산재 인정에 대한 판례가 드물던 시절이라 온갖 자료를 준비하고 애쓴 유 의원의 기쁨은 남달랐다. “딸 넷인 딸 부잣집의 막내딸이기도 했지만 바로 아래 남동생을 봤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나를 많이 아끼셨다. 그런데 대학 가서 학생운동을 하고, 노동운동 한다고 도망 다니기 바쁘고, 결혼도 수배자와 하는 통에 007 작전처럼 조마조마하게 예식을 치르는 등 이래저래 속을 많이 썩였다. 시어머니랑 사느라 ‘내 손으로 밥 한 끼 따뜻하게 지어드려야지’ 하던 다짐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라 한이 더 컸는데, 그나마 마지막 가시는 길에 뭔가 해드린 것 같아 위안이 됐다.”

유 의원은 이 사연을 대변인 시절에도 문 대표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6년 8월 당내 여성 최고위원(전국 여성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처음 공개했다. 부산 지역 대의원대회 때 부산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이 사연을 얘기한 것. 얼마 전 청와대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그때 들은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와의 동행

민주화 이후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던 유 의원이 정치에 눈을 뜬 것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나면서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재야 운동권을 이끌고 있던 김 전 의장이 1990년대 초반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서울 서대문에 있던 그 사무실에 유 의원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성균관대 민주동우회가 더부살이를 시작하면서 인연이 맺어졌다. 김근태 전 의장은 1995년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시작해 15~17대 의원과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유 의원은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회 사무국장, 의원실 보좌관 등을 맡으며 김 전 의장을 보좌했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이던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한 김 전 의장은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1년 말 세상을 떠났다. 최근 영화 〈1987〉이 흥행하면서 박종철 열사와 똑같은 곳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한 김 전 의장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유 의원은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공채 1기로 당직자가 된 뒤 부대변인, 수석부대변인 등을 맡았다. 각종 당내 선거를 치러보니 당 안에서 김 전 의장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GT계’ 내부의 판단이 작동했다.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9번을 받았으나 낙선했고(바로 앞 번호인 18번까지 국회에 입성했다) 4년 후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후보로 재도전해 국회에 입성했다. 2016년 총선 때는 2위와 1만4000여 표 차이로 가장 어렵다는 재선에 성공했다.

유 의원은 김근태 전 의장을 만난 게 개인적인 행운이자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의장님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 배웠다. 그는 겸손과 서민적인 삶, 따뜻함이 몸에 밴 분이다. 호텔에서 행사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고, 화장지도 한 장 뽑으면 반씩 나눠 써서 참모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늘 강조한 게 따뜻한 시장경제, 뉴딜, 사회적 대타협이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도 〈제민지산〉이라는 작은 잡지를 내면서 ‘국민들이 먹고사는 걸 책임지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강조하시곤 했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경제 민주주의가 더욱 절실해진 요즘, 따뜻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부재가 너무나 안타깝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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