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지구에 ‘마법사 사리’(〈요술공주 샐리〉)가 다녀간 이래, 마법 소녀들이 인간계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학여행 오듯 지구에 놀러 왔고, 종족을 초월한 우정과 사랑을 쌓으며 놀다가 각자의 행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지구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초래됐다. 마법 에너지의 흔적이 지구에 남았다. ‘마법력’은 인간을 지배하고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싶은 이들을 자극했다. 그들에게 편승하고 싶은 유약한 인간도 마법 에너지를 노려 호시탐탐 사건 사고를 저질렀다. 마법 소녀들의 즐거운 외유가 인간계를 위협할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지전은 어떻게든 종식되었다. 악의 유혹에 잠식되어가는 인간에게 일말의 책임을 느낀 마법 전사들은 지구로 내려오거나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했다. 이들은 사랑과 우정, 정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커져가는 악의 무리와 맞서기에 이들의 규모는 역부족이었다. 왕에게 마력이 집중된 세습 사회, 실력과 혈통을 혹독하게 검증해 소수의 전사만 기르는 엘리트 교육 시스템, 왕에게 충성하고 전쟁에 참전하는 일만으로도 바빠 도무지 결혼과 출산의 여력이 생기지 않던 마법사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야합해 충실하게 커져만 가는 악의 세력과 달리, 마법 세계는 이상적인 지향점에도 불구하고 살기 좋은 사회구조는 아니었으므로 성장이 더뎠다. 반복된 전쟁에서 마법 전사들이 패배했다. 힘의 본원인 달 세계가 침공당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마법사들은 재기를 위해 하나 남은 공주와 몇 남지 않은 엘리트 마법 전사를 1990년대의 지구로 보내 환생시킨다. 태양계 전체가 잠식되기 전에 달을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이우일 그림

탄생의 목적이 파괴에 있는 소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의 세일러 새턴은 그렇게 소환된다. 창백한 피부, 보랏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제 키보다 큰 침묵의 낫을 휘둘러 고향을 파괴한다. 남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낫질 한 번에 모두 죽었고 달 또한 재기할 수 없는 황폐한 세계가 되었다. 제 근원을 죽여야 하는 운명은 그를 혼자로 만든다. 그의 모습을 본 최후의 생존자들은 우려의 메시지를 남긴다. 다음 세대의 마법 소녀들이 다시 모이게 되어도 세일러 새턴이 소환되는 것만은 막으라고 한다. 그녀가 다시 태어나는 날은 모든 것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마법사 세계는 다음 세대를 기다리며 무기한 휴식에 들어섰다. 환생한 전사와 공주를 빨리 찾아내 힘을 길러갈 미래를 꿈꾸며, 그곳에서 새턴만은 함께하지 않기를 빌었다.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악당이기를 원하는 사회

마법사들의 순진한 기대와 달리 20세기 말 지구는 다시금 새턴을 소환할 명분과 조건을 다 갖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인간들은 과거보다 쉽게 욕망에 타협하고 악에 물들었다. 악당들은 플로피디스켓, 인터넷 강의 등을 통해 인간을 현혹시키는 마력을 빠르게 전파했다. 이합집산하던 달의 요정들을 모아 전사로 차근차근 키워갔지만, 전사들의 마법 에너지가 커질수록 그것을 저지하거나 탈취하려는 악당들도 더 빠르게 늘어났다. 천신만고 끝에 전사들이 모두 모였지만 악당의 세력 또한 ‘마스터 파라오 90(세일러 문 시리즈의 최종 보스)’을 불러내 지구를 잠식하고 만다.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악당이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최종 보스는 지구의 지각층 전체를 자신과 동화시킬 정도로 힘을 얻는다. 마법 전사 외에는 아무도 사랑과 희망을 믿지 않고, 그들과 싸울 정의로운 힘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이까짓 지구, 누가 구해주느니 차라리 망해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새턴은 다시 태어난다. 최종 보스를 지구에서 떼어내고, 시공을 분리하는 문을 연다. 그렇게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날린다. 2회차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희망과 부활은 언제나 종말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일러 새턴은 1월6일 태어났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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