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9월13일 저녁, 전격적으로 총리직 사임을 발표하고 물러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총리의 ‘아름다운 일본 만들기’는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그는 ‘싸우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뒷심 무른 ‘봇짱(도련님) 정치가’, 즉 선거구를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연약한 ‘세습 정치가’에 불과했다.

정가인 나가타 초나 관청가인 가스미 가세키에서는 아베가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는 평이다. 개각을 단행하고 시정연설까지 마친 총리가 돌연히 사임을 표명하는 전대미문의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씨는 아베 정권 발족 직후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아베 정권은 단명으로 끝날 것이다. 그는 장 계통에 희귀한 지병을 앓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우경화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참의원 선거 대패 등으로 건강 나빠져

다치바나 씨의 예견은 적중했다. 아베 총리는 9월11일 기자회견을 열고, 돌연 참의원 선거 대패에 따라 테러 대책 특별조처법(아프가니스탄의 다국적군에게 후방 지원이 가능토록 한 법률)의 연장이 불가능해져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 사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AP Photo9월13일 저녁, 전격적으로 총리직 사임을 발표하고 물러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베가 임기를 1년도 채 마치지 않고 총리직을 내던진 속내는 무얼까. 참의원 선거 대패, 사임 압력, 동남아시아와 호주 외유 등으로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의사가 공표한 아베 총리의 병명은 위장과 십이지장이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이른바 ‘기능 장애 위장병’.

다치바나 씨에 따르면, 아베 가계는 모두 장 계통의 지병으로 평균 수명이 50세를 밑돌았다. 한 주간지 기자가 아베 일가의 묘를 일일이 조사해서 분석한 수치이다. 조부 아베 칸(중의원 의원)은 어릴 적부터 폐결핵을 앓다가 장 마비로 52세에 급사했다. 부친 아베 신타로(외상)도 췌장염으로 67세에 타계했다.

아베 역시 젊었을 때부터 장 계통에 이상이 있어 병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그가 입원했을 때는 병이 하도 희귀하다 해서 이웃 병원 의사들까지 몰려와 구경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장이 나쁜 아베 총리는 평소에도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아베 신조(심장)’가 아니라 ‘아베 간조(간장)’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

그러나 지병이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개각과 시정연설까지 마친 사람이 총리직을 그처럼 간단히 팽개칠 수 있을까. 현직에 있던 오히라 총리와 오부치 총리가 투병 중에 사망한 것에 비하면, 그는 ‘싸우는 정치가’가 못 되었던 것이다. 마치 오자와 민주당 당수와 테러 대책 특별조처법 연장이라는 ‘치킨 게임’을 앞두고 겁에 질려 스스로 차에서 뛰어내린 격이다.

아사히 신문은 아베 정권 발족 직전 ‘불안한 출발’이라는 사설에서 그의 경험 부족과 준비 부족에 큰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5선 의원에 관방장관과 자민당 간사장으로 기용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이즈미 전 총리가 일본인 납치 문제로 주가가 치솟고 있던 아베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한 데 불과하다.

후쿠다와 아소도 ‘유훈 정치’ 계속할 듯

51세의 아베가 총리로 등극하자 일본 언론들은 ‘전후 태생의 첫 총리’라는 수식어로 그를 과대 포장했다. 내각 지지율도 7할대로 치솟았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만은 이때 아베의 ‘함량 미달’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AP Photo새 총리 후보 후쿠다 야스오
아베 총리의 함량 미달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한마디로 그가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선거구를 물려받은 ‘세습 정치가’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아베가 평화 헌법 개정을 축으로 하는 ‘전후 체제에서의 탈각’이라는 구호를 소리 높이 외쳐온 것은 자주 헌법 제정에 앞장섰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총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또 미군을 지원하려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집념을 보인 것도 외조부 기시가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것과 무관치 않다.

물론 조부나 부친이 못다 펼친 정책이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집념을 불사른 세습 정치가는 비단 아베가 처음은 아니다. 오자와 민주당 대표가 소선거구 제도에 집착해 자민당을 깨고 나온 것도 부친이 열렬한 소선거구제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우정사업 민영화에 집착한 것도 조부가 체신부장관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일본의 세습 정치가들은 모두 ‘한풀이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시대에 걸맞은 공약이나 정책을 만들어 추진하기보다는 조부나 부친이 못다 이룬 한을 뒤늦게 풀어보겠다는 데 불과하다. 그러면서 북한의 ‘유훈 통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EPA아소 다로.
차기 자민당 총재와 총리로 유력한 후쿠다 야스오(6선, 71세) 전 관방장관이나 아소 다로(9선, 67세) 간사장도 모두 일본식 ‘유훈 정치’에 집착할 것이다. 후쿠다 전 장관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장남이고, 아소 간사장의 외조부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풀이 정치’나 ‘유훈 정치’를 펼치기도 전에 자민당은 1990년대에 이어 두 번째로 하야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차기 자민당 내각은 야당들의 반대로 테러 대책 특별조처법 연장에 실패하거나, 예산안 성립이 늦어지면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총선거가 실시되면 현재 여론으로 보아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 이어 또다시 대패할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야당 연립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여 년간, 하야에서 복귀한 자민당 우파 세력들의 활개로 일본에는 우경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 부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독도 영유권 주장 등등. 하지만 민주당을 축으로 한 야당 연립정권이 등장하면 사정은 달라질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아베는 자신의 ‘아름다운 일본’ 공약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자민당에 ‘자폭 테러’를 감행한 셈이다. 그가 저지른 자폭 테러로 ‘전후 정치에서의 탈각’은 당분간 물 건너가고 ‘전후 정치의 계승’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기자명 도쿄·채명석(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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