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수는 이렇게 강의를 시작했다. “이 펜을 만든 이유가 뭘까. 귀를 파려고 만든 건 아니겠지. 마이크로 등을 긁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고 만든 건 아니지. 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은 만듦에 목적이 있다.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은 어떤 존재냐는 것. 목적이 뭐지? 여기서 실존주의가 나타난다. 즉, 인간만이 실존적 존재다.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정한다.” 나는 그 교양 수업을 녹취해 붙잡아뒀다. 2008년 겨울의 일이다. 이후 뒤늦게 만난 오정희의 작품을 게걸스럽게 따라 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더 많은 ‘여성’ 작가가 필요했고 또 필요하다.
지난 12월15일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정희 작가의 소설 컬렉션이 출간됐다. 새 판본을 준비하며 작가는 가까이는 10년, 멀게는 40년 만에 다시 교정지를 펼쳐들고 문장 앞에서 골몰했다. 더러 다듬고 바로잡았다. 소설집 〈불의 강〉과 〈유년의 뜰〉 및 〈바람의 넋〉 〈불꽃놀이〉를 비롯해 첫 경장편소설 〈새〉까지 모두 다섯 권이 새 옷을 입었다.
오정희 작가에게 지난 50년은 예술과 생활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었다. 그 속에서 망설임이 많았음은 말하지 않아도 헤아려지는 무엇. 출판사가 공개한 북 트레일러 속에서 흰머리 소복한 모습의 오 작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당부한다. “작은 실패에 너무 좌절하지도, 작은 성공에 너무 연연하지도 마라. 때때로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거 같은 결단이 인생에서는 필요할 때도 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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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을 응원한다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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