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거리〉를 처음 읽었던 날의 ‘사로잡힌’ 기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버짐 핀 아홉 살짜리가 되어 할머니도, 엄마도, 매기 언니처럼도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의 마음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연민도 기만도 없이, 성장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중국인 거리〉는 내가 처음 만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오정희 컬렉션〉(전 5권)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후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수는 이렇게 강의를 시작했다. “이 펜을 만든 이유가 뭘까. 귀를 파려고 만든 건 아니겠지. 마이크로 등을 긁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고 만든 건 아니지. 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은 만듦에 목적이 있다.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은 어떤 존재냐는 것. 목적이 뭐지? 여기서 실존주의가 나타난다. 즉, 인간만이 실존적 존재다.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정한다.” 나는 그 교양 수업을 녹취해 붙잡아뒀다. 2008년 겨울의 일이다. 이후 뒤늦게 만난 오정희의 작품을 게걸스럽게 따라 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더 많은 ‘여성’ 작가가 필요했고 또 필요하다.

지난 12월15일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정희 작가의 소설 컬렉션이 출간됐다. 새 판본을 준비하며 작가는 가까이는 10년, 멀게는 40년 만에 다시 교정지를 펼쳐들고 문장 앞에서 골몰했다. 더러 다듬고 바로잡았다. 소설집 〈불의 강〉과 〈유년의 뜰〉 및 〈바람의 넋〉 〈불꽃놀이〉를 비롯해 첫 경장편소설 〈새〉까지 모두 다섯 권이 새 옷을 입었다.

오정희 작가에게 지난 50년은 예술과 생활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었다. 그 속에서 망설임이 많았음은 말하지 않아도 헤아려지는 무엇. 출판사가 공개한 북 트레일러 속에서 흰머리 소복한 모습의 오 작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당부한다. “작은 실패에 너무 좌절하지도, 작은 성공에 너무 연연하지도 마라. 때때로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거 같은 결단이 인생에서는 필요할 때도 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살자.”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