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주목받는 1인 출판사 ‘제철소’의 김태형 소장.
지난해였다. ‘제철소’라는 1인 출판사의 존재와 이름을 처음 알려준 한 작가가 있었다. 그는 제철소가 내놓은 첫 책이 희곡집이라고 말했다. 약간 주저하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어…, 문학도 안 팔리는데 희곡이 될까요?” “어차피 다 안 되니까요.” 그도 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희곡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학이지만 이제 와 문학의 여러 범주 중에서도 ‘기타 등등’이 되어버린 무엇. 희곡집을 하겠다고 독립한 편집자는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일던 차였다. 출판인 62명의 설문지를 취합한 결과, 제철소의 이름이 근소한 차이로(!) ‘올해의 루키 출판사’로 선정됐다. “‘이게 되겠어?’를 ‘이것도 되는데!’로 바꾸기 위해 벌였을, 또 벌이고 있을 분투를 응원한다”라는 추천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2015년 11월30일은 제철소의 첫 책 〈당신이 잃어버린 것〉의 판권 날짜이다. 국내 젊은 극작가 9명이 모여 만든 ‘창작집단 독’이 함께 쓴 희곡집이다. 큰 출판사에서 10년간 편집자로 일했던 ‘감’으로 1쇄 3000부를 찍어 그중 대부분이 창고에 남아 있는 비운의 책. 그런데 이 편집자, 그런 일로 쉽게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제철소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1월30일에 희곡집을 두 권이나 냈다. 〈여학생〉과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는 심지어 청소년 희곡집이다. 제철소는 지금까지 모두 13권의 책을 냈고 그중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2016)까지 4권이 희곡집이다.

김태형 소장은 제철소가 ‘보다시피’ 희곡 전문 출판사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라든지, 앞으로도 희곡집을 계속하고 싶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같이 사는 친구도 편집자인데, 처음에 내색은 안 했지만 상당히 불안해했던 거 같아요. 책도 상품이고 팔아야 하는 거잖아요. ‘얘는 장사할 생각이 있는 건가?’ 싶었다고(웃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못할 거 같지는 않았대요.”

김 소장은 2005년 푸른숲출판사의 아동·청소년 문학을 담당하는 편집자가 되었다. 이후 사계절로 이직해서도 아동·청소년 문학을 맡았다. 시간을 쪼개 2006년 〈당신의 의미〉를 시작으로 〈철수 영희〉 〈멸〉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등의 연극 극본을 쓰고 무대에 올렸다.

10년차가 됐을 때 독립을 결심했다. 대개의 1인 출판사가 주력 분야를 정하고 출발하는 것과 달리, 별다른 방향을 생각하지 않았다. 성인 단행본을 해보고 싶었다. 희곡집 역시 대단한 사명감으로 내는 건 아니다. “협소하긴 해도 연극은 관객이 있어요. 그런데 희곡 독자는 없다고 봐야 하거든요. 길게 보고 그 독자층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공연장에서 팔린 책 270권

그래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 희곡집 〈여학생〉이 나온 시점은 수록작 중 한 편인 박춘근 작가의 〈말들의 집〉(연출 김현우)이 국립극단에서 공연될 때였다. 국립극단에 〈여학생〉 위탁 판매를 부탁했다. 2주 남짓한 공연 기간에 270권이 팔렸다. “출판사들이 독자랑 스킨십을 늘린다고 강연 기획을 많이 하는데, 사람들이 강연은 들으러 가도 책은 생각만큼 안 사요. 판매량을 떠나서 공연장에서 책이 팔린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출판사 이름인 제철소의 제철은 ‘알맞은 시절’의 의미를 담았다. 담금질할수록 강해지는 쇠처럼 오래가는 단단한 책을 만들겠다는 뜻도 있다. 명함에는 ‘대표’라는 직함 대신 제철소라는 이름에 맞게 ‘소장’이라는 직함을 새겼다. “혼자밖에 없는데 뭘 대표하겠어요. 소장이라는 말, 친근하고 좋더라고요. 책 만드는 일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재밌어서 계속하는 거 같아요. 같이 일하고 싶은 필자를 만나서 통하는 기분이 들 때, 그 순간이 너무 좋고요. 계약할 때 머릿속으로는 책이 다 나오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 짜릿하죠. 제가 책을 통해 힘을 받았으니까, 내가 낸 책으로 또 누군가가 힘을 얻지 않을까. 그래서 하는 거 같아요. 누군가 제철소에서 낸 이야기를 읽고 한 시절을 견디고, 또 ‘제철’을 기다리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 신기해요.”

등단한 시인이나 소설가는 사실상 국내 3대 문학 출판사에 ‘전속’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인 출판사가 국내 문학을 하고 싶을 때 마주치는 벽이기도 하다. 제철소에서 나온 책의 저자들 대부분도 거의 첫 책 저자다. 누군가는 이를 1인 출판의 한계라고 말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출판사이기 때문에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더불어 커나갈 수도 있다. 그렇게 발굴한 필자가 여러 매체와 출판사에서 찾는 저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보상’이 된다.

김태형 소장에게 기운을 준 것은 이웃 출판사 위고, 코난북스와 함께 만든 ‘아무튼 시리즈’였다. 세 출판사의 협업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일정을 칼같이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게 슬럼프 극복에 도움이 됐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주제로 문고본 형태의 에세이 시리즈를 만들자는 아이디가 나왔다. 회의를 빙자한 술자리가 거듭됐다. 세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가 달라도 너무 다른 덕분에 중복된 소재 없이 저자와 라인업이 기획됐다. 지난 9월 1차분 다섯 권(〈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서재〉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아무튼, 쇼핑〉 〈아무튼, 망원동〉)이 나왔고, 12월 2차분 세 권이 추가로 나왔다. 제철소에서는 시리즈 1차분에서 ‘서재’(김윤관 지음)와 ‘망원동’(김민섭 지음)을, 2차분에서는 ‘스웨터’(김현 지음)를 맡았다. 앞으로는 세 출판사가 한 번에 같이 출간하기보다는 돌아가면서 ‘월간’ 형식으로 자유롭게 낼 계획이다.

재미있는 시도였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1인 출판사가 협업해 시리즈물을 낸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주목도 많이 해주셨고, 주요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셨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판매가 순조롭지는 않아요. 저희 모두 약간 힘이 빠진 상태인데, 시리즈의 좋은 점이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앞의 책이 소환될 여지가 있으니까 길게 보고 가려고요.”

3년차에 접어든 제철소가 세운 목표는 소박하다. “책 한 권을 내놓으면 다음 책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 정도만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해결되면 잡지 교열·교정 아르바이트부터 그만두고 싶어요(웃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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