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라면 누구나 탐내는 저자 1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필자’이자 편집자들이 ‘내 필자’ 삼고 싶은 저자로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가 꼽혔다. “학문을 하고 책을 쓰는 이유가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이타적인”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떤 책들이 되어 나올지 계속 지켜보고 싶다” 같은 평을 얻었다. “주제에 대한 전문적 역량과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책임을 엿볼 수 있었다”라는 의견도 나왔다. 김 교수의 첫 책인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은 출간 4개월 만에 5쇄를 찍었다.

들뜬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거절할 수 없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 몰려드는 각종 섭외는 대부분 마다했다. “저는 누가 막 칭찬하면 내가 뛰어나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이라서(웃음). 이 시간을 잘못 보내면 망가져요. 특별히 대단한 결심은 아니고 학생, 가족, 공부 이 세 가지가 제 일상인데 이걸 유지하는 걸 우선순위에 뒀어요.” 2016년에 이어 올해도 학생들이 강의 평가를 통해 뽑은 ‘최고의 강의에 주는 석탑 강의상’을 받았다.

ⓒ시사IN 신선영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위)는 ‘출판사가 탐내는 저자 1위’로 손꼽힌다.

책의 서문에도 등장하는 ‘인생의 근거지’ 같은 스승인 ‘이금준 선생님’은 책을 다 읽고 부러 학교까지 찾아와주셨다. 저녁을 먹고 차를 나눠 마시고 함께 걸으며 들었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김 교수의 마음에 깃발이 되어주었다. “이제 김 선생은 무슨 일을 해도 이 책을 만든 김 선생의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되지 플러스가 되기는 힘들겠구나.” 그 염려에 담긴 진심이 다소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기도 했다.

책을 내고 나니 딱 한 가지가 좋았다. 김 교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이 그가 ‘하는 일’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그사이 새로운 싸움도 시작했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의 비과학적 낙인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만드는 연구에 돌입했고, 지난 4년간 진행해온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바탕으로 성전환 수술 건강보험 적용을 위해 비공개 포럼을 조직하는 등 ‘첫 삽’을 떴다.

지난 〈시사IN〉 인터뷰(제522호 ‘데이터가 말하는 인권과 건강의 상관관계’ 기사 참조)에서 〈은하철도 999〉와 〈고스트 바둑왕〉을 진지하게 말하던 그는 최근 지난 7월 출간된 〈바닷마을 다이어리 8:사랑과 순례〉(애니북스)를 만화방에서 발견하고 충격받았던 얘기를 꺼냈다. “이 책 나온 거 알고 계셨어요? 정말? 왜 내 주변에는 이 책 나왔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누가 저한테 ‘어떤 글을 쓰고 싶냐’라고 물으면 저는 주저 없이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책이요’라고 말할 거 같아요.”

인간을 함부로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자존을 해치지 않고, 삶에 대한 이해가 순진하지도 않은 점이 좋다고 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만큼 결이 풍부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만화다. “저는 가끔씩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가 되고 삶이 새롭게 보이는 때가 있잖아요. 제가 만약 앞으로도 저를 지키면서 잘 살면, 또 그런 순간들을 만날 거 아니에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 어려워져요. 그런 이야기들을 제 연구를 통해 하고 싶어요.”

불교 신자이지만 성경의 4대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필사할 정도로 좋아한다. 보수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자를 향해 ‘지옥 간다’고 말하지만, 김 교수가 성경에서 읽은 예수는 동성애자가 지옥에 간다면 가장 먼저 지옥으로 들어갈 사람이었다. 4대 복음과 플라톤과 논어와 도스토옙스키와 박완서를 건너,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요시다 아키미까지 책과 책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다만 지금은 치기 어렸던 20대처럼 책을 ‘명제’로 외워 기억하지 않는다. ‘에너지’로 기억해뒀다가 삶과 엉키는 순간을 만나 자신의 언어로 말해지기를 기다린다.

‘더 생산적이고 좋은 연구’를 하는 꿈

김승섭 교수가 지도하는 연구실 식구는 모두 11명, 매일 만나는 풀타임 박사과정 학생만 7명이다. 2020년까지는 신규 학생을 받을 수 없는데도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2013년부터 고려대에서 교수로 일하며 목표로 세운 게 있다. 연구실의 모든 학생이 국제학술대회에서 제1저자로 논문을 발표하도록 한다는 것. 이는 지난 5년간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고, 올해 11월에도 연구실 학생 11명 전원을 데리고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공중보건학회(APHA)에 다녀왔다. 꿈이 있다면 ‘김승섭 연구팀’이 유학 가는 것보다 한국에서 “더 생산적이고 좋은 연구”를 하는 것이다. 연구실 운영에서 투명하고, 연구 주제 선정에서 자유롭고, 논문 출판에서 생산적인 연구실을 만들고 싶다.

새 책 준비에도 시동을 걸었다. 이런저런 주제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쓰고 싶은 책이 우선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지식의 그늘〉(가제)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밑그림을 한창 그리고 있다. 몸·건강·질병에 대한 지식이 생산되는 ‘블랙박스’를 들여다보려 한다. 이를테면 사무실 내 적정 온도라고 하는 21℃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살펴보는 식이다. 적정 온도 21℃는 1960년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맞춰진 것으로, 실제로 대사량이 높은 여성에게는 24℃가 적절하다. 이처럼 성 편향적인 연구라든지 기업이 과학적 근거를 얻기 위해 어떤 로비를 해왔는지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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