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인데 새 책은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그렇기에 더욱’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올해 출간된 그림책 가운데 다른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고르라는 말에 선뜻 〈빼떼기〉를 집어 들었다. 10년 전 타계한 동화작가 권정생의 작품이다. 그림은 김환영이 그렸다.

책을 열면 빽빽하게 들어찬 활자, 줄지어 늘어선 글줄에 미간이 절로 모인다. “빼떼기가 순진이네 집에서 1년 남짓 살다가 죽은 이야기는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아름답고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1948년 7월의 어느 장날부터다.”

빼떼기는 깜장 병아리, 순진이 아버지가 장에서 사온 암탉 깜둥이가 이듬해 봄에 깐 병아리다. 어미를 따라 이리저리 솔방울처럼 굴러다니던 녀석이 군불 지핀 아궁이에 뛰어들었다. 솜털이 홀랑 타고 부리가 반나마 문드러지고 발가락은 아예 다 떨어져나갔다. 그러고도 살아남아 주춤주춤 빼딱빼딱 걷게 된 빼떼기와 순진이네 식구들이 ‘함께’ 살아간다.

에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진행되는 이야기는 파란과 곡절 많은 시대를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나아가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묵직한 붓질의 강렬한 그림이 툭툭 튀어나와 눈앞을 가로막는다. 안팎 어디를 보아도 곰살맞은 구석이라곤 없다. 한없이 나긋나긋하고 감각적이며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안온한 상상력을 펼치는 요즘 그림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어느 모로 보나 모난 돌처럼 불퉁하게 도드라진다.

〈빼떼기〉
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
창비 펴냄
권정생의 생명관이 오롯이 담긴 동화를 화가 김환영이 그림책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글은 관찰기라고 해도 무방할 듯이 촘촘하고 사실적인데 그림은 대범하기 짝이 없다. 김환영이 그려낸 세상 속 공기는 무겁고 밀도가 높다. 무엇 하나 팔랑거리지 않는다. 집요한 키질로 날릴 수 있는 건 모두 훌훌 날려버리고 묵직한 알맹이만 남겨둔 것 같다고 할까. 어쩐지 흙냄새가 느껴지는 색감, 힘 있게 죽죽 뻗으며 휘감기는 거친 붓 자국, 말수가 꽤 적은 이 그림들에 담긴 건 삶의 무게와 생명에 대한 연민이다.

뭉그러진 부리로 빼떼기가 모이를 먹는다. 헌데투성이 몸에 순진이 엄마가 지어준 솜옷을 입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면서도 빼딱빼딱 걸어간다. 빼떼기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숨은 감정을 캐어 올린다.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고,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뿌리 깊고 본질적인 어떤 것들을 끌어올린다. 이 책은 두툼하게 솜 두어 누빈 무명옷처럼 무겁고 투박하고 따뜻하고 아름답다.

기자명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편집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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