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 시게히코의 〈나쓰메 소세키론〉은 전혀 다른 소설의 독법을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소설 작품이나 작가를 둘러싼 ‘의미의 자장’은 문학사와 문학 제도가 만들어놓은 문학의 ‘신화’다. 그는 반문한다. “도대체 내면에 묻혀 있고 배후에 숨겨진 의미를 읽는 것이 ‘문학’이라고 언제부터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일까.” 내면이든 배후이든 의미 찾기는 결국 이미 형성되어 있는 ‘문학이라는 의미’의 체계로 돌아가고 환원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문학을 지식 혹은 역사로 소비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문학이 문학인 이유는 바로 그 환원을 거부하는 언어의 다른 질서 때문이 아닌가. 그는 말한다. “문학에서는 모든 것이 표층에 드러나 있다. 의미 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서로 앞다투어 표층에 부상해 일제히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장(場)이야말로 문학이 아닌가.” ‘문학’이라는 기억, 작가 누구라는 기억, 독자 ‘나’라는 기억이 상실되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운동으로서의 독서가 요청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말들의 출렁거림과 뒤섞이고, 작가와 독자가 비인칭의 자리에서 만나는 희박한 현재의 독서. 의미로, ‘나’로 환원되거나 회수되지 않고, ‘나’의 변용이 그 운동 속에서 실천적으로 일어나는 독서. 누구든 물을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하냐고. 모르겠다. 나로서는 저자에게 설복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눕는 존재들, 물이나 비와 조우하며 소설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소세키의 인물들을 따라가며 하스미 시게히코는 기억상실의 독법을 경이롭게 실천해 보인다. 아마도 이 책은 문학의 언어와 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현재적 삶을(혹은 죽음을) 하나의 표층에서 행복하게 껴안으려 한 가장 도전적인 시도로 남으리라.